-조선시대

김유기의 시

김영도 2020. 7. 29. 21:25

김유기(金裕器)는 숙종 때의 가인이다.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에 김천택이 쓰기를, “김군 대재(大哉)는 노래를 잘 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일찍이 병신년(丙申年, 1716, 숙종42?)에 내가 그의 집에 갔다가 상자를 뒤져서 책 한 권을 얻었는데, 펴보니 그가 지은 새 노래였다. 고쳐주기를 요청했지만 내가 말하되 가사를 보니 말은 정경(情境)을 다했고 가락은 음조에 맞아 참으로 악보 중 빼어난 것이네. 나의 시원찮은 재주로 어찌 고치겠는가?’ 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한두 해가 지나 이미 묵은 자취가 되었으니 조자건(曹子建)의 존몰지감(存沒之感)이 북바쳐 올랐다. 이에 나는 그가 남긴 작품을 모아 세상에 보이니 그의 이름과 더불어 썩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시조 15수가 전한다.

 

 

불충(不忠) 불효(不孝)하고 죄 많은 이내 몸이

구구(苟苟)히 살아 있어 하온 일 없거니와

그러나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늙기 설워하노라.

 

 

장부(丈夫)로 생겨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 못 할지면

차라리 다 떨치고 일 없이 늙으리라.

이 밖에 녹록(碌碌)한 영위(營爲)에 거리낄 줄 있으랴.

 

 

내 몸에 병이 많아 세상에 버려져서

시비영욕(是非榮辱)을 오로다 잊었건마는

다만지 청한(淸閑)한 일벽(一癖)이 매 부르기 좋아라.

 

 

오늘은 천렵(川獵)하고 내일은 산행(山行) 가세.

꽃 다림 모레 하고 강신(講信)으란 글피 하리

그글피 편사회(便射會)할 제 각지호과(各持壺果) 하시소.

 

 

주객(酒客)이 청탁(淸濁)을 가리랴 다나 쓰나 마구 걸러

잡거니 권하거니 양(量)대로 먹으리라.

취하고 초당(草堂) 밝은 달에 누웠은들 어떠리.

 

 

그의 작품을 크게 보면, 현실을 반영한 것들과 자신이 바라는 바를 드러낸 것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현실을 반영한 것부터 보자. 첫 수는 구차하게 살아가는 삶이지만 늙어감을 탄식하였고, 둘째 수는 입신양명을 못하는 울분을 표현했으며, 셋째와 넷째 수는 매사냥과 여러 가지 여가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수는 취흥을 말한 것이다.

첫 수에서 자신이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중인이라 충성이나 효도도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구차하게 살아간다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그런 삶이라도 늙기는 섧다고 탄식하였다. 태평성대란 말은 여기서는 차라리 반어다. 신분차별이 엄연한 시대가 태평성대는 아닐 것이니, 조선 후기의 민중은 이렇게 신분제도의 모순을 절감하고 있었다. 둘째 수에는 신분제도의 모순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져 있다. 입신양명을 막아놓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의미가 있겠는가. 모두가 하잘 것 없는 일이라고 팽개치고 일 없이 늙어갈 것이라고 했다. 시대적 부조리에 분노를 누를 길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사는 민중의 한이 숨겨져 있다. 셋째 수에서 쓸모없이 세상에서 버려진 것이 병 때문이라 했지만 시비영욕을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은 마음속 분노를 삭이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그래서 가슴 속 울분을 풀기 위해 매사냥을 나간다는 것이다. 넷째 수에는 입신양명은 막혔으니 날마다 소일하는 일거리들을 늘어놓았다. 천렵과 산행, 화전놀이와 계 놀이, 편 갈라 활쏘기 등등이다. 마지막 수는 그래도 삭지 않는 가슴속 분노를 삭이기 위해 청탁을 가리지 않고 술을 양껏 마시고서 취하여 달 아래 초당에 누워서 만사를 잊어버리면 어떠냐고 하였다. 대장부로 태어나 입신양명하여 능력과 소신을 펼쳐보고 싶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의 벽에 막혀 절망하고 분노했던 그의 심중을 시조로 풀어냈음을 알 수 있다.

 

 

춘풍(春風) 도리화(桃李花)들아 고운 양자 자랑마라.

창송(蒼松) 녹죽(綠竹)을 세한(歲寒)에 보려무나.

정정(亭亭)코 낙락(落落)한 절(節)을 고칠 줄이 있으랴.

 

 

태산(泰山)에 올라 앉아 사해(四海)를 굽어보니

천지사방(天地四方)이 훤출도 한저이고.

장부(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오늘이야 알괘라.

 

 

백세(百歲)를 다 못 살아 칠팔십(七八十)만 살지라도

벗고 굶지 말고 병 없이 누리다가

유자(有子)코 유손(有孫)하오면 긔 원(願)인가 하노라.

 

 

난간에 기대 앉아 옥적(玉笛)을 빗기 부니

오월(五月) 강성(江城)에 흩듣느니 매화로다.

한 곡조 순금(舜琴)에 섞어 백공상화(百工相和) 하리라.

 

 

태산(泰山)이 평지(平地)되고 하해(河海) 육지(陸地) 되도록

북당(北堂) 구경하(具慶下)에 충효(忠孝)로 일삼다가

성대(聖代)에 직설(稷契)이 되어 늙을 뉘를 모르리라.

 

 

이번에는 그가 바라는 것을 표현한 작품들을 보자. 첫 수는 시절을 잘 만나 희희낙락하는 무리에 대하여 자신은 송죽 같은 절개를 보이겠다는 각오를 보인 것이고, 둘째 수는 태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호연지기를 느껴보고 싶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소박한 자신의 소망을 담은 것이고, 넷째 수는 피리를 불며 순임금 시대처럼 만백성이 화합하던 시대가 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읊은 것이며, 마지막 수는 오래도록 효도와 충성을 다하며 태평성대의 대신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첫 수는 봄바람에 예쁘다고 뽐내는 복사꽃과 오얏꽃을 들어 시절을 만나 삶을 즐기는 무리를 상징했다. 아마 문무관으로 입신양명하는 사람들을 두고서 한 말이겠다. 흔히 도리화는 간신배를 뜻하지만, 그는 신분차별을 개탄했던 만큼 굳이 간신을 뜻하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대조된 추운 날의 푸른 송죽도 절개 굳은 사람이라는 관습적 의미보다는 신분장벽에 굴하지 않는 자신을 두고서 하는 말이겠다. 종장에서 굳세게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기도 하다. 둘째 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 느끼는 확 트인 느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은 그런 호연지기를 지니고 살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셋째 수는 자신의 소망이 병 없이 오래 살고 의식 걱정이 없으며 자손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이다. 넷째 수는 원대한 소망이다. 난간에 기대어 옥피리를 부니 여기에 조응하여 오월의 매화가 진다고 했다. 오월의 매화는 어울리지 않지만 청각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의 조응이다. 순임금이 오현금으로 남풍시(南風詩)를 읊자 신하들이 화합하여 노래했듯이, 자신도 옥피리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이를 화합케 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는 좀 지나친 욕망을 토로했다. 초장부터 불가능한 상정이다. 그만큼 강조한다는 뜻이다. 오래오래 부모님을 모시고 충효를 다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종장에서 태평성대의 직설(稷契)이 되겠다고 했으니, ()과 설()은 순임금 때의 구관(九官)을 맡았던 대신들이다. 자신도 당대의 대신이 되어 충효를 오래도록 다하고 싶다는 큰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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