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

충청남도 아산시 김옥균선생 유허와 여민루 탐방기

김영도 2019. 11. 17. 23:56

1.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길 26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김옥균>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와 묘이다.
생가지는 정안면에서 동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지점인데 터는 없어지고 넓은 밭 가운데 감나무만 서 있다. 그 자리에 1989년 2월 22일 공주군 주관으로 대지 2,473㎡에 생가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묘는 아산시에 있으며 묘역에는 석등·석양(망주석()·문인석()·비 등이 세워져 있다.
김옥균은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근대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노력이 대원군의 수구파와 대립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상하이[]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고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양화진()에서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김옥균을 존경하던 한 일본인이 효시()된 머리를 일본 도쿄[]의 청산외인묘지()에 묻고 비를 세웠는데, 1914년 9월 11일 의발()을 이곳으로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여민루>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1415년(태종 15)에 아산현감 최안정()이 빈객이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조선시대 아산현의 문루()로 지어졌다.

2층 목조건물로 동향한 낮은 기단 위에 사각형의 초석을 갖춘 주형() 초석을 배열하여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설치하였으며, 하층은 정면 3칸에 각각 문을 달아 통로로 사용하였다. 좌우 협칸의 문미()에는 홍살을 설치하였고 측면의 2칸은 판벽으로 막았다. 공포는 2익공인데 외출목이 없으며 처마 밑의 기둥 사이에는 간략화된 화반형의 초각반을 중앙문에 3개, 다른 문에는 2개씩 배치하였다. 지붕 가구()는 앞 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었는데 대들보 위에 소로를 두고 그 위에는 뜬 창방, 다시 이 뜬 창방 위에 주두를 놓아 종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합각() 부분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아산현의 관아는 원래 저습지에 있어서 사신을 접대하는데 불편하여 객사 동쪽에 누각을 지었는데 이것이 태종 때의 건물인지 그뒤에 다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누각의 명칭은 정이오()가 지은 누기()의 ‘취위민지의( : 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를 따서 조선 숙종 때 지중추원부사인 임홍망()이 여민루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4.탐방일자 

2019.11.17(일)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