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

경기도 광명시 무의공 이순신장군묘 탐방기

김영도 2015. 12. 20. 16:41

1.위치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2.교통

(갈때)(올때)자가용

 

3.상세설명

본관은 전주(),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부르며,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방답첨사(使)라는 직위로 자주 언급되어 ‘방답첨사 이순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 이제()의 후손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낸 이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의주판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관과 불화하여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방답진() 첨절제사(使)로 부임하여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서 중위장()과 전부장()으로 활약하며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고성() 해전, 사천() 해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1593년(선조 26) 선조에게 방답첨사 이순신이 적과 싸울 때 언제나 선두에서 공을 세웠으나 적을 죽이고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 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은 힘쓰지 않아 홀로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당상관()인 정3품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1594년(선조 27)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사간원()의 관리들에게 형률()을 지나치게 엄하게 적용해 백성의 원성을 사고 성격이 교만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탄핵을 받았다. 1595년에는 조도어사(調)로 파견된 강첨()에게 군량미 200여 섬을 감추어 두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는 일도 겪었다. 그 뒤 이순신은 평안도우후()를 거쳐 압록강 인근의 고령진() 첨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使)로 임명되어 다시 왜군과의 해전에 참전했다. 그는 삼도수군통제사(使)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다시 중위장 등으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8년 이순신은 전라수사(使)로 있으면서 그해 음력 8월 조정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음력 11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는 경상우수사로 있으면서 충무공을 대신해 조선 수군의 전열을 수습했다. 당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은 이순신을 충무공의 뒤를 이어 통제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게첩()을 선조에게 보내오기도 했으나 조정 관리들의 반대로 그대로 경상우수사의 직위에 머물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이순신은 1598년(선조 32) 한양의 포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해 음력 10월 직위를 남용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장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충청수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황해도 병마절도사, 수원부사(使),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602년(선조 35)에는 전라좌수사(使)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순신은 조정 관료들의 견제로 외직()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 1604년(선조 37)에야 중추원의 정3품 무관인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그해 선무공신() 3등으로 책록되었다. 하지만 1606년(선조 39) 다시 외직인 수원부사(使)로 임명되었고,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1608년(선조 41)에는 임해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기도 했다. 1610년(광해 2)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했다. 이순신은 숙종 때인 1679년(숙종 5) ‘무의()’의 시호를 받았다.

 

4.탐방일자

2015.12.19(토)

 

5.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6.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