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2

경기도 하남시 하남위례길 제2구간 위례강변길13.5k(산곡천~서울)

김영도 2015. 11. 4. 08:38

1.위치

산곡천/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동축구장/경기도 하남시 선동 287-3

 

2.교통

(갈때)서울역환승센터에서 9301번 버스로 검단산입구 하차 도보로 산곡천

(올때)미사고교정류장에서 마을버스 10번을 타고 하남시청~9301번 버스로 환승하여 서울역

 

3.코스

산곡천~덕풍천~미사리 경정공원~미사리 선사유적지~나무 고아원~선동축구장~서울

 

 

4.상세설명

<미사리 경정공원>   

* 우리 가족 행복충전소, 미사리 경정공원 *
한강변의 미사리조정·카누경기장은 올림픽대로를 타고 하남시쪽으로 가다가 팔당대교와 만나기 전에 나타나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과거에는 카페촌으로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별미집들이 많이 생겨나 가족들의 나들이 명소로 부상했다.

88서울올림픽 당시 조정, 카누경기가 열렸던 곳으로 지금은 공원구실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40만여평의 대지 위에 10여만평의 호수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드넓은 호수주위를 따라 잘 단장된 5km의 자전거 하이킹코스는 미사리조정경기장의 최대 자랑거리이다. 싱그런 잔디와 자연녹지, 각종 생활체육시설과 여가시설은 가족 단위의 쾌적한 여가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올림픽대로와 중부고속도로, 팔당대교와도 인접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넓은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

* 미사리 근린공원의 시설 *
경기장 부근에 축구장·족구장·농구장 등의 운동시설과 산책로, 자전거 하이킹코스, 놀이보트, 어린이 자연학습장(※ 조정 및 카누는 어린이날 특별행사로만 진행)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스포츠와 여가를 즐기기에 적합한 공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1995년 5월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친목회나 야유회·야외결혼식·소풍·체육대회·CF와 영화촬영 등 각종 행사가 열린다. 올림픽대로와 중부고속도로 및 팔당대교와 가까워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넓은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사리 선사유적지>

서울에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팔당 쪽으로 곧장 나아가면 미사리 조정경기장이 나온다. 행정지명으론 미사동인데 여전히 옛 이름 그대로 정감 있게 불리는 미사리. 그리고 시원스레 물살을 가르며 박진감 있게 달려나가는 보트들. 그 젊음의 축제가 열리는 한강변에 적어도 아득히 먼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선사유적지가 있다. 어둡고 긴 밤 달려와 역사의 새벽을 연 값진 흔적들을 보여주는 곳은 모두 40여 만 평. 그 가운데 6만 평을 발굴한 결과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가 시대별로 층위를 이루고 있었고, 각 층에서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선사시대 복합 유적지인 것이다.

미사리 선사유적지는 강 안의 충적지에 있다. 모래 채취지역으로 활용되던 1979년 어느 날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지표면에 얼굴을 내밀면서 선사유적지의 면모가 드러났다. 이듬해인 1980년 서울 시내 대학연합체로 발굴단을 구성, 발굴에 착수함으로써 크나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발견된 층위는 모두 7층. 제6층과 7층에서 신석기시대의 움집과 바깥화덕자리가 나타났다.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뗀돌도끼, 돌살촉, 어망추 등 1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대략 5,200년 전 안팎의 것으로 판명된 이들 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과 문화형성층이 같은 사람들의 것으로 밝혀졌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집자리 24기, 갈무리 시설 11기, 흑도·홍도 등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유구()보다 훨씬 더 많다.

 

제4층은 썩은유기질이 많이 섞인 흑색 부식토층으로, 그 위쪽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무늬없는토기와 움집 같은 것이, 아랫부분에서는 어골문의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쇳물을 녹인 용광로 가마터로 추정되는 유구와 쇠를 다룬 작업장, 숯덩이 등의 발견은 철기시대로 진입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철제 낚싯바늘, 철촉, 철편 등은 완성된 철제들이다.

지표면을 포함한 3개 층은 다소 뒤섞여 있는데 주로 원삼국시대 집자리와 알모양토기, 회색연질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타원형 움집에 계단식 출입구와 화덕을 갖춘 집자리도 있었다.

강에서 민물고기와 어패류를 얻고, 산과 들에서 사냥 하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살아온 선사시대인들은 차츰 농업을 발전시킨다. 비옥한 한강변의 충적지는 일찍이 생활터전을 잡기에 적절한 곳이었고, 수천 년 동안 생활근거지로 대물림해왔던 것이다. 한 곳에서 수천 년의 삶을 이어온, 차별화된 지층과 유적을 발견하기란 매우 드문 일이다. 따라서 미사리 유적은 한국 선사문화 편년()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이 터전 위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정착, 철기문화를 꽃피우면서 백제 건국의 주역이 되었고 삼국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는 다시 백제인들의 문화유적을 주목한다. 4∼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1천 평과 3천 평 규모의 백제시대 밭[]은 고랑과 이랑이 뚜렷했고, 30㎝ 폭으로 작물을 심었던 흔적이 선명했다.

 

뿐만 아니라 온돌방을 가진 주거지와 음식을 만들어 먹던 시루와 토기, 저장시설을 비롯해 무려 97군데에 걸쳐 백제 유구가 발견됨에 따라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도성의 하루를 기록하는 데 사용한 벼루, 둔전()1)을 이용해 밭을 갈고 양식을 얻었던 유적 등 모두가 선진화된 유구였다.

파키스탄의 인더스강가에서 기원전 5천 년 무렵의 경작유구가 발견된 일이 있기는 하지만, 밭고랑이 좁고 면적도 적어 연구대상으로는 흡족치 못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미사리 백제시대 밭과 유물들은 세계적인 연구대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고, 수천 년 역사의 선조들 생활상이 집약된 귀한 유적지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1992년 11월 정부는 이 지역의 모래를 파내 강폭을 넓히고 홍수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4천여 평을 밀어붙여 대부분의 유적지를 덮어버렸다. 당시 남겨둔 유적지는 남북 1,470m, 동서 20∼40m의 넓이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늘날엔 흔적 없이 묻혀버려 사전지식 없이 찾아가면 강변의 경치만 구경하고 돌아서기 십상이다.

미사리 선사유적지 주변으론 미사리 조정경기장이, 그 뒤쪽으로는 이성산성이 둘러서 있고, 한강 바로 건너편엔 덕소가, 왼쪽으론 아차산성이, 그 주변으론 도시순환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 한강유람선 선착장을 만들고 유원지화할 계획이어서 미사리 선사유적지는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5.탐방일자

2015.11.03(화)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항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