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시2

경기도 김포시 DMZ평화누리길 제1구간 염하강철책길16.6k(대명항~문수산성 남문)

김영도 2014. 10. 6. 19:27

1.위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와 월곶면 포내리 산36-1 일대

 

2.교통

(갈때)부평역정류장에서 90번 버스를 타고 솔터마을입구 정류장에서 60-3번 버스로 환승한후 대명항에서 하차한다

(올때)성동검문소 정류장에서 90번 버스로 부평역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코스

대명항~덕포진~원머루나루~김포CC~문수산성 남문 

 

4,상세설명

<대명항>

강화해협을 사이로 강화도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김포시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포구이다. 규모는 작지만 어시장과 어판장에서 꽃게·대하·망둑어·주꾸미·농어·숭어를 비롯해 김장용 새우젓·멸치젓 등을 살 수 있고, 즐비한 횟집에서는 횟감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서울에서 가깝고 인근에 역사의 현장인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 천연 미네랄 라듐천인 약암온천 등이 있어 주말에는 크게 붐빈다.
서울~강화를 잇는 김포가도인 48번 국도를 타고 누산 삼거리에서 양촌면과 대곶면 소재지를 지나 석정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포구가 나오고, 우회전하면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으로 갈 수 있다.

 

<덕포진>

한강과 연결되는 강화해협은 조선시대 외세침입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촘촘하게 늘어선 진, 보, 돈대는 김포와 강화 해안선을 따라 위치한다. 조선시대 군사 방어시설의 제 모습을 관찰하고 싶다면 덕포진을 찾아보자. 강화해협 중에서도 가장 좁은 폭을 사이에 두고 김포의 용두돈대와 마주하는 이곳은 진지를 따라 이어지는 1.5㎞의 산책로가 마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앞으로 두고 있는 진지는 구한말, 프랑스와 미국의 서양 군함을 맞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의 격렬한 전투를 치룬 역사의 현장이다. 불과 700여 년 전,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아픔의 장소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당시 지휘소였던 파수장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상황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다.
돌아나가듯 굽이도는 강화해협의 물살은 ‘손돌목’이라 불린다. 원나라의 공격으로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정한 고려의 국왕 고종이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다 거꾸로 흘러가는 배의 방향을 보고 적의 첩자로 오인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손돌은 마지막 순간 흐르는 물살에 바가지를 띄워 이것을 따라가라 유언하였고 흐르는 물살을 따라 거꾸로 향하던 바가지는 강화도의 해안으로 안전하게 나룻배를 인도하였다.
손돌의 억울한 죽음은 덕포진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비석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도 손돌의 생일인 음력 10월 20일 무렵 불어오는 매서운 강화해협의 바람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손돌의 영혼이 실린 ‘손돌바람’이라 불린다. 덕포진의 호젓한 산책은 인근 대명항과 포구를 함께하기에 좋다. 서해 바다의 먹거리로 가득한 포구는 못생긴 고기로 유명한 ‘삼식이’ 회 맛을 보는 곳으로 유명하다.

 

<문수산성>

조선 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조선시대의 산성.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명칭은 산내에 있는 문수사에서 유래하였다. 이 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1694년(숙종 20)에 축성되었고 1812년(순조 12)에는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는데,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이 성은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곳으로 특히 유명하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희생을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10월 11일 군함 7척, 대표 10문, 병력 1천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10월 16일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梁憲洙)를 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도를 수복케 하였으나, 26일에 벌어진 문수산성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가진 총포의 위력을 당해낼 수 없어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때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다.

 

5.탐방일자

2014.10.06(월)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

 

 

 

 

 

 

 

 

 

 

 

 

 

 

 

 

 

 

 

 

 

 

 

 

 

 

 

 

 

 

 

 

 

 

 

 

 

 

 

 

 

 

 

 

 

 

 

 

 

 

 

 

 

 

 

 

 

 

 

 

 

*특이사항:토사자,도꼬마리(창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