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吳竣, 1587-1666)은 광해군․인조․효종․현종 때의 문신이고 서예가다. 실록과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여완(汝完)이고 호는 죽남(竹南)이며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32살(1618, 광해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전적을 지냈다. 인조반정 후, 지평, 장령을 거쳐 수찬, 필선을 역임했고, 글씨를 잘 써서 교서 서사관이 되었다. 53살에 한성부 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으며,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썼다. 56살에 일본사신의 요청으로 일광사(日光寺)의 조선등로명(朝鮮燈爐銘)을 써 주었다. 이듬해 등극부사로 심양에 다녀왔다. 59살에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다음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62살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종이 즉위한 후, 예조판서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인조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대사헌, 우참찬, 좌우빈객, 지경연사 등을 지냈다. 현종 즉위 후에 좌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나 노병으로 사직했다. 80살에 판중추부사로 죽었다. 성질이 부드럽고 글씨를 잘 썼다.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와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비 등도 그의 글씨다.
살아서 먹던 술을 죽은 후에 내 알더냐.
팔진미(八珍味) 천일주(千日酒)를 가득 벌여 놓았은들
공산(空山)에 긴 잠든 후는 다 허산가 하노라.
살아있을 때 술을 즐기자는 취락(醉樂)적 사고를 드러낸 것이다. 실록에 보면, 그는 젊어서 이이첨을 따르는 무리라고 사관(史官)의 비난을 받기도 했고, 사나운 부인에게 기가 눌려 집안의 다스림이 반듯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대부 사이에 인망이 없었고, 관직과 관련해 뇌물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자식간에 재산으로 다투었다고 한다. 글씨를 잘 써서 조정의 길사나 흉사의 책문을 많이 썼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고 했다. 좀 가혹한 사관의 평이지만, 얼마간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집안이 어수선하고 성품이 무르기만 하니 술로 눈앞의 분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조를 남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초장에서 술이야 살았을 때 즐기는 것이지 죽은 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해서 현실적이고 쾌락적인 생각을 나타냈다. 이런 취락적 경향은 생활의 불만이나 삶의 허무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중․종장은 초장에서 말한 주지(主旨)의 부연이다. 중장은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늘어놓은 것으로, 성대하고 진귀한 음식과 천일 동안 익힌 맛 좋은 술을 나열했다. 종장에서는 그런 미각의 즐거움이나 현실적 쾌락은 죽고 나면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였다. 술을 통하여 현실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삶의 허무를 극복코자 한 쾌락주의적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