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張炫)은 인조․효종․현종 때의 역관이다. 실록에 의하면, 생몰 연대는 자세하지 않고 인조 때 집을 너무 호화롭게 지어 대사헌 김상헌이 잡아들여 가두고 다스렸다.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재력을 쌓았고, 대가(大家)의 청탁이 끊이지 않았으며, 딸이 궁의 나인으로 들어가 있어 세력을 부려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다. 효종 4년(1653)에 청나라에 가면서 규정 이상의 인삼을 가져가 금령을 어겼고, 또 내사(內司)를 핑계 대었다고 해서 심문을 받았으나 임금이 그와 동생 장찬(張燦)을 사면했다. 현종3년(1662)에는 진주사를 따라가 조사받던 일을 잘 응대해서 직급이 올랐다. 현종7년에는 청나라 조사관에게 조사받을 때 역관의 우두머리가 되어 즉시 통보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국 후 심문을 받았다. 현종13년에 연경에 가서 긴요한 문서를 찾아오고 그 동생 장찬은 송환한 방물을 자력으로 실어왔기 때문에 직급이 올랐다. 숙종 때의 장희빈은 그의 종질녀이다.
나니 저 아이를 머리 땋아 길렀더니
세월이 덧없어 어이 그리 자라건고.
그 아이 옥등(玉燈)에 불 켜 들고 님을 좇아 다니거다.
압록강(鴨綠江) 해 진 후에 어여쁜 우리 님이
연운만리(燕雲萬里)를 어디라고 가시는고.
봄풀이 푸르고 푸르거든 즉시 돌아오소서.
앞에 것은 딸을 길러서 궁녀로 들여보낸 감회를 읊은 것이고, 뒤에 것은 역관으로 국경지대에 나가서 잡혀가는 세자와 왕자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첫 수의 초장은 딸이 태어나니 곱게 길렀다는 사실의 서술이다. 중장은 세월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어엿한 처녀로 자라났음을 기뻐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지금은 그 아이가 입궁해서 궁중나인으로 옥등에 불을 켜 들고 임금님 옆에서 시중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비록 사실을 담담하게 나열했지만 딸을 끼워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은근한 자부요 과시다. 그는 딸의 세력을 의지하여 재산을 늘리고 세력을 부렸던 것이다.
둘째 수의 초장은 청나라에 항복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게 된 암담하고 비통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중장은 심양으로 잡혀가는 길을 연운만리(燕雲萬里)라고 표현했다. 중국의 옛 연나라 지역인 북경과 장성남쪽에 있는 열여섯 고을
(涿,薊,檀,順,瀛,莫,蔚,朔,應,新,嬀,儒,武,寰,幽,雲)을 연운16주(燕雲十六州)라 했는데, 이 지역으로 가는 구름 낀 만 리 길쯤의 뜻이겠다.
그 때는 청나라가 아직 연경으로 옮아가기 전이니까 연나라 지역으로 가지는 않지만 어쨌건 만주로 향한 길이다. 종장에서는 봄풀과 왕손을 연결시켜서 봄풀이 푸르러지거든 왕손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흔히 한시에서는 봄풀은 해마다 푸르러지는데 왕손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의 문학적 관습으로 사용하고, 자연물은 순환하는데 사람의 생명은 순환하지 않는 데 대한 지극한 슬픔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관습적 표현을 빌려서 잡혀가는 세자와 왕자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