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효종의 시

김영도 2020. 8. 10. 22:05

효종(孝宗, 1619-1659)은 조선의 제17대 왕이다. <효종실록> <연려실기술> 등에 의하면, 이름은 호()이고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이며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다. 8(1626, 인조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3살에 장유(張維)의 딸과 혼인했으며, 17살에 모친상을 당했다. 병자호란이 나자 강화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머물다 돌아왔다. 27(1645, 인조23)에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로 책봉되어 32(1649)에 즉위했다. 김자점 등 공서파를 축출하고 청서파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용하여, 오랜 볼모생활의 원한을 설욕하고자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한때 김자점의 밀고로 기밀이 누설되어 어려움을 당했으나 이를 잘 무마하고,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 군제 개편,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팽창하여 북벌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37(1654, 효종5)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조총병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41살에 죽어서 북벌계획은 중단되었으나 국력은 충실해졌다. 김육(金堉)의 주장으로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쓰게 했다. 새 역법을 채택하고, 관개에 수차를 썼으며. <농가집성>, <내훈>, <삼강행실도>, <경민편>, <선조수정실록> 등을 간행했고,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만들게 했다.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냐 초하구(草河溝) 어디메오.

호풍(胡風)도 참도 찰사 궂은 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이 행색(行色) 그려내어 님 계신 데 드릴고.

 

 

너도 형제로고 우리도 형제로다.

형우제공(兄友弟恭)은 부럴 것이 없거니와

너희는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이니 그를 부러 하노라.

 

 

앗가야 사람 되어 온몸에 깃이 돋혀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푸드득 솟아올라

님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을 굽어볼까 하노라.

 

 

장풍(長風)이 건듯 불어 부운(浮雲)을 헤쳐내니

화표천년(華表千年)에 달빛이 어제런듯

묻노라 정영위(丁令威) 어디 가뇨 너는 알까 하노라.

 

 

모두 7수지만 우선 네 수를 보자. 병자호란 이듬해에 인질로 심양에 잡혀가서 지은 작품들이다. 첫째 수는 잡혀가는 도중의 행색과 처참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고, 둘째 수는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억류되어 있을 때의 형제우애를 읊은 것이며, 셋째 수는 고국의 부왕(父王)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드러낸 것이고, 넷째 수는 만주 벌판의 달밤에 차라리 신선이 되고 싶은 소망을 노래한 것이다.

첫째 수의 초장에서 의주에서 심양으로 가는 도중의 지명을 대구형식으로 묻고, 중장에서 만주의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그려서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제시했다. 종장에서 이러한 행색을 부왕에게 전하고 싶다는 서럽고 분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국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읊어서 뼈아픈 민족 시련의 상황을 핍진하게 드러내었다. 둘째 수는 아마 형제를 상징하는 기러기를 보고서 지은 시인 듯하다. 종장의 천지와 더불어 끝이 없다는 말이 기러기와 어울림 직하기 때문이다. 초장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형제처럼 줄지어 가는 것을 보고 너희들도 안항(雁行)이지만 우리도 안항이라고 했다. 중장에서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것을 형우제공(兄友弟恭)으로 파악하고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다고 하며, 심양에 있을 때도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를 끌고 가려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하여 그냥 두게 했다고 한다. 중장에서는 기러기가 천지와 더불어 끝없이 사이좋게 사니 자신들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인조와 불화했던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고, 강빈이 투기하고 임금이 먹을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무고를 받아 죽은 후에 효종은 형의 소생을 돌보아 주고 지위를 회복시켰던 만큼 형제와 우애롭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셋째 수는 온몸에 깃털이 나서 새가 되어 하늘로 솟아올라 심양에 억류된 처지를 벗어나서 부왕이 계신 고국의 궁궐로 날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새에다 투사한 것이다. ‘앗가야는 감탄사다. , 새처럼 날아서 한양으로 가고 싶다는 말에서 억류된 그의 답답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넷째 수는 앞의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새가 아니라 신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에서는 멀리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뜬 구름을 헤쳐낸다는 말로 암담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을 드러내고, 중장에서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흰 학으로 변하여 성문의 푯말에 앉아서 집을 떠난 지 천년인데 성곽은 여전하나 사람들은 변했다고 한 고사를 인용하여, 그 학을 비췄던 달빛도 마치 어제의 달빛 같다면서 천년이 하루 같은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였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정영위의 종적을 물어서 자신도 현실의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인질로 억류되었던 8년의 고초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이런 신선지향의 상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제 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지(漢陽城池) 날 속였나.

저근덧 외어 불러 이내 소식(消息) 전할쏘냐 못 전할쏘냐.

우리도 님 보러 바삐 가는 길이니 전할동 말동 하여라.

 

 

조천로(朝天路) 보믜단 말가 옥하관(玉河關)이 비단 말가.

대명(大明) 숭정(崇禎)이 어드러로 가시건고.

삼백년(三百年) 사대성신(事大誠信)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그 무엇이 우습건대

만산홍록(滿山紅綠)이 휘드르며 웃는구나.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 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일곱 수 중 나머지 세 수다. 첫째 수는 22(1640, 인조18) 26살에 잠시 고국에 왔다가 되돌아갔는데, 이 때 고국으로 오면서 지은 것으로 부왕을 뵈러 가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수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명나라의 종말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읊은 작품이다. 셋째 수는 봄비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호쾌한 기상으로 노래한 것이다.

첫째 수의 초장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두고 한양성의 못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한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행여 먼저 날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중장에서는 기러기를 잠깐 불러서 자기가 돌아가고 있다는 전갈을 먼저 부왕께 전하겠느냐 못 전하겠느냐 하고 묻고 있다. 얼마나 부왕을 만나고 싶었으면 이렇게 자신이 돌아간다는 전갈이라도 먼저 전하고 싶었겠는가. 그런 심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말이 격식을 넘어서서 중장이 길어졌고, 종장도 함께 길어졌다. 엇시조의 파격으로 나아가는 기미가 보인다. 종장은 자신의 심정이 이렇게 들뜬 까닭이 부왕을 뵈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 기러기가 이런 소식을 전할지 모르겠다고 미심쩍어 하였다. 오래도록 멀리 떨어져 있다가 아버지를 만나는 기대와 기쁨이 진솔하게 표현되었고, 기러기를 끌어들여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 것이 천진스럽다고 하겠다.

둘째 수는 자신이 청군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명나라 군이 북경 근처 옥하관에서 도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종말을 슬퍼해서 지은 작품이다. 초장에서 명나라에 천자를 뵈러 다니던 길인 조천로(朝天路)가 이제 황폐하게 되었고 북경 서북쪽의 옥천에 있는 옥하관(玉河關)은 지키는 군사도 없이 비었다고 설의법으로 서술하였다. 중장에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어디로 갔느냐고 애통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종장에서 명나라를 3백 년 동안 섬겼던 조선의 정성과 신의는 한갓 꿈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이 시로 그가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중시했고, 왕위에 오른 후에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것도 국치의 설욕뿐만 아니라 명에 대한 신의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수는 아마 왕위에 오른 후에 지은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의 어조가 온화 관대하여 만백성을 포용하는 군왕의 아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의 설정이 범상한 솜씨가 아니다. 맑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를 누군가 우습다며 웃고 있다고 했다. 독자는 시인의 설정에 궁금해 하며 빨려들어 가게 되어 있다. 중장에서 웃는 것은 온 산에 붉고 푸르게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라고 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과 잎들이 마치 사람처럼 봄비를 반기며 웃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탁월한 비유인가. 종장에서 따뜻한 봄바람이 얼마나 가겠느냐고 웃을 만큼 웃게 놓아두라고 했다. 꽃과 잎들이 봄날을 마음껏 즐기도록 놓아두라는 것이다. 군왕의 여유 있는 풍도가 잘 표현되었다. 그의 치세는 비록 짧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빠르게 회복하고 백성의 고통을 완화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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