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숙종 때의 문신이다.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그의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며 본관은 반남으로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24살(1677, 숙종3)에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시관이 되어 <좌씨춘추>에 있는 ‘아름다운 병은 나쁜 약보다 못하다.’라는 구절을 시제로 내었다가 남인들로부터 차자(次子)인 효종이 즉위한 것을 풍자한 것이라고 탄핵을 당하여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27살에 부수찬이 되고 다음해 수찬, 부교리, 지평, 정언 등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이단하가 이조판서가 되자 그가 미봉한 일이 많다며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다. 29살에 사가독서 하였고, 송시열을 비난하고 자신의 외조부인 윤선거가 강화에서 죽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여 노론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33살에 부수찬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이조좌랑이 되고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수찬, 부응교가 되었다. 36살(1689, 숙종15) 기사환국에 사직 오두인(吳斗寅) 등과 함께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을 망각하고 절의를 세운다며 혹독한 형벌을 당하고 진도로 유배가던 도중 과천에서 죽었다. 학문과 문장에 재능이 있고 글씨에 능했으며, 청렴개결하여 꿋꿋한 기상이 있었다.
청산(靑山) 자와송(自臥松)아 네 어이 누웠는가.
광풍(狂風)을 못 이기어 부러져서 누웠노라.
가다가 양공(良工) 만나거든 날 예 있더라 하구려.
흉중(胸中)에 불이 나니 오장(五臟)이 다 타 간다.
신농씨(神農氏) 꿈에 보아 불 끌 약 물어보니
충절(忠節)과 강개(慷慨)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
그는 재능과 기상이 있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했고, 그래서 임금과 반대파의 미움을 받아 여러 어려움을 당하다가 죽었다. 이 시조들에도 어려움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와, 재능과 기상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울분이 드러난다. 두 편 다 문답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첫 수의 초장에서 작중화자는 푸른 산에 절로 누운 솔에게 어째서 누웠느냐고 묻는다. 물론 소나무는 굳센 기상과 훌륭한 자질을 갖춘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중장에서 솔이 대답하기를 미친바람에 못 이겨 부러져 누웠다고 했다. 미친바람이란 혼란스런 정국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러한 정치 풍파에 쓰러졌다는 말이다. 종장에서 솔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당부하기를 좋은 목수를 만나거든 훌륭한 재목이 쓰러져 있으니 가져다 쓰라고 했다. 자신이 훌륭한 재목이고 푸른 솔 같이 늠름한 기상을 지녔음을 자부한 것이다.
둘째 수는 숙종이 장희빈을 왕후로 앉히려 하자 격렬한 어조로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그 울분을 토로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장에는 가슴 속의 울화를 흉중의 불이라고 은유했다. 속에서 불이 난다는 말은 아주 흔한 비유다. 이 불에 오장이 다 탈 지경이라고 했으니 가슴 속 울분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말이다. 중장에는 중국 고대 전설에 불을 발견하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신농씨를 꿈에 보고 불 끌 약을 달라고 한다. 불과 약을 발견했으니 불을 끌 약도 가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종장에는 자신의 울화는 충절과 강개로 인한 것이니 이런 불은 끌 약이 없다고 했다. 충간을 올리는 자신의 의기를 스스로 객관화하여 충절과 강개의 불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의 잘못에 맞섰으니 ‘임금을 망각하고 절의를 세운다.’며 악형을 당해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