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래교의 시

김영도 2018. 12. 17. 16:33

정래교(鄭來僑, 1681-1757)는 숙종경종영조 때의 문인이다. <완암집>에 의하면, 자는 윤경(潤卿)이고 호는 완암(浣巖)이며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홍세태(洪世泰)에게 배워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시에 능했다. 25(1705, 숙종31)에 통신사의 역관으로 일본에 갔다가 청신하고 낭만적인 시로 그 곳에서도 유명해졌다. 37살에 진사가 되었고, 42살에 노론이 임인당화(壬寅黨禍)를 당할 때 그들과 교유했기 때문에 계룡산 완암곡(浣巖谷)으로 피신했다. 61살에 벼슬에 나가 이문학관, 승문원 제술관 등을 지냈다. 홍세태를 따라 당시의 사대부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만년에 그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사람됨이 말끔해서 여윈 학 같았고, 매우 가난했다. 시사(詩社)의 벗들이 그를 부르면 실컷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는데, 호탕하고 비분강개한 어조가 있었다. 그의 시는 본래적 순수성을 지닌 개성, 곧 천기(天機)를 얻은 것이 많았다. 그의 문장도 뛰어났으며, 거문고와 장가(長歌)도 묘경에 이르렀다

  



오동(梧桐)에 월상(月上)하고 양류(楊柳)에 풍래(風來)한 제

수면천심(水面天心)에 소요부(邵堯夫)를 마주 본 듯

이 중에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를 어느 분이 알리오.




주란(朱欄)을 기대 앉아 옥소(玉簫)를 높이 부니

명월청풍(明月淸風)이 값없이 절로 온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장야음(長夜飮) 하리라.




그는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의 서문에서 노래의 가사들은 생각을 서술할 뿐 아니라 가슴 속의 답답함을 풀어내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것이 악부에 올라 풍화(風化)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시의 본질과 효용을 꿰뚫어 본 말이다. 위의 시조에서 첫 수는 우주의 운행을 고요히 음미하는 소옹(邵雍)의 경지를 모방해 본 것이고, 둘째 수는 청풍명월 속에서 자신의 흥취를 즐기는 모습이다. 내면적 깨우침과 흥겨움을 시조로 풀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첫 수에는 한문투를 많이 섞으면서 소옹의 시(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를 이용하여 시조를 만들었다. 초장은 대구인데, 오동나무에 달이 뜨고 버드나무에 바람 불 때라는 상황을 제시했다. 중장은 하늘이 비취는 수면 같은 평정한 마음으로 소옹의 시에서 표현한 경지를 음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소옹의 말대로 이런 맑고 격조 높은 경지를 깨우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다. 소옹의 시를 모방한 것이지만 교묘한 재창조다. 둘째 수의 초장에서 붉은 난간에 기대 앉아 피리를 부는 행동을 묘사했다. 자신의 흥취를 풀어내는 행동이다. 중장에서 이 때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밝은 달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이다. 피리의 흥취가 정절에 이르렀을 때 자연의 운치가 함께 조응하는 것이다. 청각과 시각의 어울림이다. 종장에서 이런 경지에서 시인은 술을 부어 밤새도록 취흥을 즐긴다고 하였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요, 배경과 주체가 흥겨움으로 물아일여가 된 상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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