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성응의 시

김영도 2018. 12. 12. 23:45

김성응(金聖應, 1699-1764)은 영조 때의 무신이다. <영조실록><미호집(渼湖集)>에 따르면, 그의 자는 군서(君瑞)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증손이다. 초시에 합격한 후, 30(1728, 영조4)에 장붕익(張鵬翼)의 추천으로 사복시 내승으로 기용되고 선전관을 거쳐 고부군수가 되었다. 35살에 도총부 도사에서 별군직으로 전임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정주(定州)목사를 거쳐, 36살에 경상우병사, 동부승지, 황해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군정을 일신했다.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 총융사를 거쳐 어영대장이 되고, 38살에 훈련대장을 거쳐, 이듬해 한성우윤, 지훈련원사 등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곧 형조판서가 되었다. 40살에 한성판윤이 되고, 이듬해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44살에 포도대장, 이듬해 훈련대장을 역임하고, 52(1750, 영조26)에 판의금부사, 54살에 판돈령부사, 63살에 병조판서, 64살에 금위대장 등을 두루 거쳤다. 성품이 너그럽고 위엄이 있었다.




용천검(龍泉劍) 빼어들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짓밟으니

모두성(旄頭星) 떨어지고 호천(胡天)이 비었구나.

아마도 대명일월(大明日月)을 다시 볼까 하노라.

 



그는 왕의 척신(戚臣)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10년 사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임금은 그를 복장(福將)이라고 두둔하였으므로 고속으로 승진하여 20년간 병조판서와 훈련대장 등을 번갈아 가며 역임하여 군정을 책임지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이 시조에도 그의 자신감이 표현되어 있다. 무장(武將)의 기상을 상징하는 용천검을 빼어들고 중국을 대유하는 만리장성을 짓밟았다는 말은 청나라를 정벌하고 싶다는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심을 설욕하려는 의지는 북벌책이 무위로 끝난 뒤에도 무장의 가슴 속에 복수심으로 남아있었음을 알게 한다. 모두성은 별자리의 하나로 북방 오랑캐의 별자리[胡星]. 오랑캐의 별이 떨어지고 오랑캐의 하늘이 비었다는 말은 청나라가 망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천하를 재건하고 싶다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생각을 드러내었다. 임진왜란에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것인지 오랜 중국 문화 숭배에 대한 고정관념인지 알기 어렵지만, 아직 북학파의 주장이 퍼지기 전인만큼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민족의 보편적인 감정이었고, 이런 감정은 무장에게 더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재호의 시  (0) 2018.12.12
김용겸의 시  (0) 2018.12.12
김진태의 시  (0) 2018.12.12
문수빈의 시  (0) 2018.12.12
김중열의 시  (0) 201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