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2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길 제11구간 수목원길(광릉내~대궐터)

김영도 2016. 12. 15. 09:00

1.위치

광릉내/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대궐터/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2.교통

(갈때)부평역~회기역~상봉역~별내역에서 73번 버스로 광릉내정류장 하차

(올때)대궐터정류장에서 73번 버스로 망우역~회기역~용산역~부개역

 

3.코스

광릉내~벼락소~대궐터






 

4.상세설명

<대궐터>

'대궐터'라는 지명을 간직한 마을 한 가운데 주택들에 둘러 싸여 옛 영화를 무색케하는 허름한 유지비를 보고 왔습니다.
 여기에 '풍양궁'이라는 '궁'이 있었다는데요. 
'풍양궁(동이궁(東離宮)이라고도 함)'은 조선 초기 세종대에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설치했던 이궁을 말합니다.  당시 도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풍양궁(豊壤宮), 서쪽에 연희궁(衍禧宮), 남쪽에 낙천정(樂天亭 : 일명 臺山離宮)의 삼이궁이 있었는 데요. 이 삼이궁의 조성계획은 태종대부터 있었으나 실제 준공은 세종 초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합니다.동이궁(東離宮)이라고도 불리웠던 풍양궁은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도호부조에 "양주의 동남쪽에 있으며 곧 풍양현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동하여 계시던 곳"이라 하였습니다.

도성 주위에 이렇게 이궁을 설치한 가장 큰 목적은 왕자의 난 등 으로 인해 유사 시 임금의 피방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인데피방(避方)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에 있었다지요.
다시 말하면 왕실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 도성 가까운 곳에 이궁을 지어 놓고 피방의 장소로 삼았던 것입니다.

서울 주변에 이궁을 조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궁궐에서 부엉이가 우는 변괴 때문이었다는데요.

 '왕자의 난'으로 이복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적장자인 양녕을 대신하여 숭녕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린 1419년(세종 1) 태종은 궁궐에서 부엉이가 울자 옛 기록을 찾아보고 궁궐에서 부엉이가 우는 것은 흉한 징조라고 하여 피방할 장소를 물색하게 하였다 합니다.

당시 개경 근처에 기존에 사용하던 이궁이 있기는 하였으나 개경까지는 거리가 멀어 왕래하는 데에 폐단이 있었으므로 서울과 가까운 포천과 풍양에 본궁(本宮) 노자(奴子)만으로 10여 칸 규모의 집을 지었고 그리고 낙천정을 거쳐 포천으로 내왕하면서 흉한 방위를 피하고자 하였다지요. 당시 왕권을 다투는 권력투쟁이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에 풍양궁은

주로 피방처나 상왕인 태종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하는데 특히 한 여름철의 휴식처로서 각광받아 태종이 단오절이 임박하여 석전희(石戰戱)를 보려고 하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양궁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전해집니다.

풍양궁이 이처럼 여름 휴식처로 이용되면서풍양궁을 수축하고 가장 먼저 대비가 거처를 옮겼는데 병을 치유하고자 공기가 맑고 산수가 좋은 곳에서 지내려고 했던 것이겠지요.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풍양궁에서 거의 살다시피한 태종이 승하하자  풍양궁에 대한 관리가 점차 허술 해 지게 되다가 이후 중종대에 풍양궁을 왕의 행차시 머물게 되는 대주정으로 삼게 되는 데1523년(중종 18) 지독한 흉년으로 선왕의 무덤인 광릉에 참배하려는 데서 비롯 되었다지요.  봉선전(지금의 봉선사)에서 다례(茶禮)를 거행하고 궁으로 돌아올 때 사냥을 구경하고자 하였는데, 그 때 머물던 곳이 풍양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풍양궁은조선 후기에 어떤 이유로 불타 버렸다는 데요. 
그  이유는 잘 알지 못하고 다만 1696년(숙종 22)의 기록에 의하면, 풍양궁은 터만 남아있다고만 전한다지요.

이로 보아 풍양궁은 임진란과 병자란을 거치면서이미 건물은 불에 타 소실되고 터만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중종 이후 풍양현이 폐지된 다음 풍양이라는 지명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남양주지역 일대는 여전히 왕실의 강무장으로 사용되어 졌습니다.

 이 후 이와 같이 터만 남아있는 풍양 이궁에 비를 세우도록 한 것은 1755년(영조 31)의 일이랍니다.

영조는 선대의 릉을 알현하고 풍양에 거처하려고 하는데 聖祖의 옛 궁궐터에 아무 표식이 없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고, 구궐 유지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곳이 대궐터였음을 알리는 지명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풍양궁과 관련된 지명으로'내동'마을은태조 이성계가 내각리의 비각마을에 행궁을 정하였을 때 왕비 강씨가 임시로 머물렀다고 하여 '내동'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궐리'라는 지명은 태종이 이곳에 행궁을 정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며, 비각을 세운 후로 이 마을은 '비각마을'이라고 불렸으며, 지금도 '대궐터'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5.탐방일자 

2016.12.13(화)   

 

6.글쓴이

김영도(010-8121-8041) 

 

7.생생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