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의 시
성운(成運, 1497-1579)은 중종, 명종, 선조 때의 학자다. <선조실록>에 실린 졸기와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의하면, 자는 건숙(健叔)이고 호는 대곡(大谷)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35살에 생원이 되었으나 기묘사화에 많은 선비가 죽은 이후라 벼슬에 뜻이 없어 처가가 있는 보은 속리산 종곡(鍾谷)에 우거하며 자연의 풍광을 즐기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형인 참봉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진복창의 모함으로 옥사하니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이지함(李之菡), 서경덕, 조식 등 당대의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자질이 단정하고 기상이 호일(豪逸)하였으며 성품이 순실(淳實)하고 온후하여 금옥과 같았다. 남을 가르치거나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으며 세상에 알려지기를 싫어했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모셔 성대(聖代)를 다시 보니
태고건곤(太古乾坤)에 일월(日月)이 광화(光華)로다.
우리도 수역춘대(壽域春臺)에 늙을 뉘를 모르리라.
전원(田園)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나무는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
아이야 대 베어 오느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첫 수는 온 세상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는 전원생활의 분주함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 수에서는 현실 사회에 관심을 닫아버린 입장에서 세상이 태평하다고 시대착오적이거나 현실외면적인 말을 하는 것이고, 둘째 수는 전원에 숨어사는 사람에게 봄철이 다가와 일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늘어놓아 전원 흥취를 살려낸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요순 같은 임금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했는데, 중종, 인종, 명종 때는 정쟁으로 인해 사화나 옥사가 많았고, 거기에 실망하여 그는 속리산 대곡에 숨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은 현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 아니고 듣기 좋게 미화한 것이거나 뒤집어 풍자한 것이라고 하겠다. 중장에서도 옛날의 요순시절 같이 천지에 해와 달이 빛나는 태평한 때라고 하였다. 종장에서 이런 태평시절에 늙을 줄을 모른 채 임금의 은혜를 즐긴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는 그의 태도로 보아 현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거나 형이 희생된 정쟁의 회오리를 멀리 피하려는 조심성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수의 초장은 시골에 봄이 오면 농사일이 시작되므로 바쁜 철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는 보은군 삼산현(三山縣) 대곡에 처가인 김씨의 재산이 있어 거기에 정착하였는데, 농사 일이 많았을 것이다. 중장은 그가 걱정하는 일을 나열하였다. 꽃나무 옮기는 것과 약밭을 가는 일이다. 그가 몸소 밭을 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가에서 받은 토지와 노비를 처남 아들과 형의 딸을 결혼시켜서 물려주고 후사를 부탁했다 하니 몸소 밭을 갈 처지는 아니었다. 학문을 연마하고 산수를 즐기면서 때때로 화초를 가꾸고 약밭을 둘러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전원생활의 구체적인 제시다. 종장에도 아이를 시켜 대를 베어다가 삿갓을 겯겠다고 하였으니 험한 일을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바쁜 전원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전원의 흥취를 살려내고자 한 것이다. 퇴계는 그의 은둔한 풍치는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고 하여 ‘은둔하여 성취한 이’[隱成]라고 했으니, 이 시의 분위기와 어울린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