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의 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선조실록>의 졸기와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등에 따르면, 그의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峰)이며 본관은 행주(幸州)로 나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23살에 생진 양과에 올라 사림에 이름이 났다. 어려서 모친을 잃었고 29살에 부친을 여의었다. 32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사가독서 하였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을 토론하였고 뒤에 서신으로 사단칠정변론을 계속하였다.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등이 되었으나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삭직되었다. 권신 이양(李樑)이 물러난 뒤 수찬, 전적, 이조정랑,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선조 즉위 후에 사헌부 집의, 전한이 되어 조광조와 이언적의 추증을 건의했고,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불화하여 해직 당했다. 다시 공조참의, 대사간이 되었으나 조정의 의론과 맞지 않고 대신과 임금도 중히 여기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던 도중에 병이 나 죽었다. 자질이 뛰어나고 기개가 높았으며, 효우와 예를 실천하였다.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까마는
백년(百年)이 못 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丈夫)야 일러 무엇 하리오.
이 시조는 현실의 부귀영화가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체관(諦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가 성리학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을 탐구하여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밝히고 유교도덕을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이므로 부귀와 권세에 골몰하는 권신 훈척을 보고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풍자한 것이다.
초장에 나온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는 위나라 군주의 동생으로 신릉군(信陵君)에 봉해졌고 식객이 3천명이나 되었다. 조(趙)나라가 진(秦)나라의 침략을 받았는데 위나라 장군 진비(晉鄙)가 형세를 관망하자 그를 죽이고 군사 10만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했던 사람이다. 임금의 동생이요 식객 3천명을 거느릴 만큼의 재력을 가졌으며 군사 10만을 탈취할 정도의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호화롭고 부귀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인물을 들먹인 까닭은 당대의 윤원형(尹元衡)과 이양(李樑) 같은 외척과 권신을 대비해 보려는 숨은 뜻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신릉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다. 중장에서는 이백(李白)의 시 ‘양원음(梁園吟)’에 나오는 “옛날 사람에 호화롭고 부귀한 신릉군이 있었는데 / 지금 사람들 신릉군의 무덤을 갈아 씨를 뿌리네. (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신릉군 같은 부귀와 권세로도 백년이 못 가서 그의 무덤마저 흔적 없이 사라져 전답이 되었다고 하였다. 종장에서 그만 못한 사람들이야 거론할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 말은 부귀와 권세를 탐하는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라 하겠다. 기개가 높고 훈구대신이나 기존 권위에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던 그의 풍모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