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문의 시
권호문(權好文, 1533-1587)은 명종ㆍ선조 때의 학자다. <송암선생별집>의 연보와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자는 장중(章仲)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살부터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30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18살에 부친을 잃고 33살에 모친을 잃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퇴계는 그를 산림 선비의 풍이 있다고 했다. 부모의 산소가 있는 마감산(麻甘山) 아래에 종모암(終慕庵), 연어헌(鳶魚軒)을 짓고 부모를 영모(永慕)하고 천지의 도를 궁구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38살에 관물당(觀物堂)을 짓고 기거하며 강학했다. 유성룡(柳成龍),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권문해(權文海) 등과 교유하고 학문을 토론했으며, 퇴계의 문집 간행에 힘썼다. 42살에 청성정사(靑城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47살에 집경전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50살에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기체가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시조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등을 지어서 전원에서 한거하는 뜻을 밝혔다. 죽은 후 제자들이 청성산 아래에 송암서원을 세웠다.
생평(生平)에 원하느니 다만 충효뿐이로다.
이 두 일 말면 금수(禽獸)나 다르리야.
마음에 하고자 하여 십재황황(十載遑遑) 하노라.
계교(計較) 이렇더니 공명(功名)이 늦었어라.
부급동남(負笈東南)하여 여공불급(如恐不及) 하는 뜻을
세월이 물 흐르듯 하니 못 이룰까 하여라.
비록 못 이뤄도 임천(林泉)이 좋으니라.
무심어조(無心魚鳥)는 자한한(自閒閒)하였느니
조만(早晩)에 세사(世事) 잊고 너를 좇으려 하노라.
강호(江湖)에 놀자 하니 성주(聖主)를 버리레고
성주(聖主)를 섬기자 하니 소락(所樂)에 어기어라.
호온자 기로(岐路)에 서서 갈 데 몰라 하노라.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첫째부터 넷째 수다. 벼슬길과 임천(林泉)의 생활, 둘 중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강호로 돌아온 지난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년에 임금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면서도 임금을 외면할 수는 없어 진출과 은거에서 망설이는 듯한 자세를 드러낸다. 첫 수에는 자연 속에서 짐승처럼 살 수 없어서 충효를 실천하고자 십년 넘게 과거 공부에 전념했음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사가 됐을 뿐, 부모마저 돌아가시고 혼란한 정국과 스승의 낙향을 보고 자신도 벼슬길을 단념했다. 둘째 수에는 이리저리 비교해 살펴보고 책 보퉁이 둘러메고 애써 공부해도 벼슬길에 나가 공명을 이루기가 어려웠던 절망적 실상을 거침없이 드러내 놓았다. 공명은 못 이루고 세월만 흘려보냈던 그때의 초조함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수는 충효를 온전하게 하는 공명을 이루지 못했으니 자연에 묻혀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다. 무심하고 한가로운 어조(魚鳥)와 더불어 세상사를 잊고 전원에서 즐거움을 찾겠다고 하였다. 넷째 수는 강호에 살기로 마음을 굳혀도 임금을 모른체하는 것이고 임금을 섬기자니 즐기는 전원생활을 버리게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기로에서 고민한다고 하였다. 임금을 모른체할 수 없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출(出)하면 치군택민(致君澤民) 처(處)하면 조월경운(釣月耕雲)
명철군자(明哲君子)는 이럴사 즐기나니
하물며 부귀위기(富貴危機)라 빈천거(貧賤居)를 하오리라.
청산(靑山)이 벽계임(碧溪臨)하고 계상(溪上)에 연촌(烟村)이라.
초당(草堂) 심사(心事)를 백구(白鷗)인들 제 알랴.
죽창정야(竹窓靜夜) 월명(月明)한데 일장금(一張琴)이 있느니라.
바람은 절로 맑고 달은 절로 밝다.
죽정송함(竹庭松檻)에 일점진(一點塵)도 없으니
일장금(一張琴) 만축서(萬軸書) 더욱 소쇄(蕭灑)하다.
제월(霽月)이 구름 뚫고 솔 끝에 날아올라
십분(十分) 청광(淸光)이 벽계중(碧溪中)에 비꼈거늘
어디 있는 물 잃은 갈매기는 나를 좇아 오는다.
여덟째 아홉째 수와 열한째 열두째 수다. 앞의 두 수에서 보듯이 강호에 살기로 마음을 정했으나 마음속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덟째 수에서 진출하면 임금을 섬기고 백성에게 은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전원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기로 마음을 정했음을 보여준다. 여덟째 수는 다시 진출하면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고, 은거해 살면 자연을 벗 삼아 한가하게 사는 것이라고 비교하고, 자신은 부귀를 바라다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겠다며 명철군자의 길을 택하여 빈천한 전원생활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아홉째 수는 전원에서 자연을 즐기며 사는 즐거움을 나열하여 임천에 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푸른 산과 시내, 촌락과 초당, 그리고 갈매기와 밝은 달, 이 속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한가함을 즐기겠다고 했다.
뒤의 두수는 자연과 시인이 일체가 되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른 것을 읊었다. 열한째 수는 바람 맑고 달 밝은 대 뜰 솔 난간에 나와 앉아 거문고와 책으로 벗을 삼으니 그 맑고 상쾌한 기운이 한 점 티끌도 없다고 했다. 은거하는 선비의 한가한 경지다. 열두째 수는 밝은 달이 솔숲 위에 솟아 맑은 빛을 시내 골짜기에 비치니 갈매기가 시인과 함께 논다고 하여 시인과 자연이 하나가 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주색(酒色) 좇자하니 소인(騷人)의 일 아니고
부귀(富貴) 구(求)차하니 뜻이 아니 가네.
두어라 어목(漁牧)이 되오야 적막빈(寂寞濱)에 늙자.
성현(聖賢)의 가신 길이 만고(萬古)에 한가지라.
은(隱)커나 현(見)커나 도(道) 어찌 다르리.
일도(一道)오 다르지 아니커니 아무 덴들 어떠리.
어기(漁磯)에 비 개거늘 녹태(綠苔)로 독을 삼아
고기를 헤이고 낚을 뜻을 어이하리
섬월(纖月)이 은구(銀鉤) 되어 벽계심(碧溪心)에 잠겼다.
강간(江干)에 누워서 강수(江水) 보는 뜻은
서자여사(逝者如斯)하니 백세(百歲)인들 몇근이료.
십년 전 진세일념(塵世一念)이 얼음 녹듯 한다.
열다섯째 수와 열일곱에서 열아홉째 수까지다. 첫 수는 서수(序首)이므로 ‘한거십팔곡’은 모두 19수다. 여기서도 자연에 묻혀서 학문을 연구하고 전원생활을 즐기겠다는 한거의 결심을 밝히는 것이다. 열다섯째 수에서 자신은 강호에 사는 문인이므로 주색이나 부귀를 구하지 않으며 고기잡이나 목동처럼 적막한 강변에서 늙어가겠다는 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열일곱째 수는 자신이 은거해 있더라도 성현의 길을 따르는 데는 현달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심성을 수양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성현의 길은 시간을 초월하여 변함없는 것이니 조정에 나섰거나 초야에 숨었거나 그 길을 가기는 마찬가지다. 성현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이상 초야에 은거한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열여덟째 수는 비 갠 후 이끼 낀 낚시터에서 고기 낚을 생각은 아니하고 시냇물에 비친 낫 같은 조각달을 감상하는 무심한 경지를 그린 것이다. 열아홉째 수는 강가에 누워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공자가 “흐르는 것이 저와 같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면 긴 세월도 잠깐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자신이 과거공부에 골몰했던 그 때 생각이 지금은 얼음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강호에서 늙어갈 생각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진출과 은둔의 갈림길에서 한 때 벼슬길을 구했으나 지금은 강호에서 한거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물아일체, 천인합일의 경지에 노닐겠다는 뜻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