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철의 시 1

김영도 2020. 8. 19. 22:43

정철(鄭澈, 1536-1593)은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선조실록>과 <연려실기술>, <송강전집(松江全集)> 등에 의하면,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인 둘째 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하여 명종과 친했다.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어 아버지가 유배되자 따라갔고, 6년 후 특사되어 고향인 전라도 창평으로 이주하여 성산(星山) 기슭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배웠으며, 이이, 성혼 등과 교유했다. 26살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지평,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31살에 헌납을 거쳐 함경도 어사를 지내고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 했으며, 수찬, 교리 등을 역임했다. 40살에 직제학, 사간 등을 지내다가 율곡이 사임하자 귀향했다. 3년 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사당(邪黨)을 지었다고 논척되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45살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별곡’과 ‘훈민가’를 지었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전라감사가 되었다. 다음해 도승지를 거쳐 함경감사가 되고, 48살에 예조참판, 형조,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으로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를 지었다. 54살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면서 동인들을 많이 축출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건의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강계로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으로 의주로 호종했고, 경기,충청,전라 체찰사를 지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하여 강화 송정촌(松亭村)에서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결백하였으며 술과 풍류를 좋아했으나 의견이 편협하고 처신에 모가 났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 대어 갚사오리.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

 뉘손대 타나건대 양자조차 같아산다.

 한 젖 먹고 길러 나있어 딴 마음을 먹지 마라.

 

 어버이 살았을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이 고쳐 못 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한 몸 둘에 나눠 부부를 삼기실사

 있은 제 함께 늙고 죽으면 한 데 간다.

 어디서 망녕의 것이 눈 흘기려 하느뇨.

 

 강원도 백성들아 형제 송사하지 마라.

 종귀 밭귀는 얻기에 쉽거니와

 어디가 또 얻을 것이라 흘낏할낏하는다.

 

앞의 네 수는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가서 지은 ‘훈민가(訓民歌)’ 16수 중 첫째, 둘째, 넷째, 다섯째 수로 각각 부의모자(父義母慈), 형우제공(兄友弟恭), 자효(子孝), 부부유은(夫婦有恩)을 제목으로 한 것이고, 이 제목들은 송나라 진고령(陳古靈)의 ‘선거권유문(仙居勸諭文)에서 따온 것이다. 끝의 한 수는 같은 때에 지은 것으로 형제간의 송사를 말리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다섯 수 모두 가족간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첫 수는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 즉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기른 가없는 은혜를 알고 그것을 갚고자 노력하라는 가르침이다. 둘째 수는 형제가 같은 부모에게서 피와 살을 물려받아 모습마저 비슷할 뿐 아니라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으므로 형은 우애롭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라는 훈계이다. 넷째 수는 어버이가 살아있을 때 효도를 다 해야지 죽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를 첫째 수에 이어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다섯째 수에서는 부부란 일심동체(一心同體)이며 살아서는 함께 살고 죽어서는 같이 묻히는 관계이므로 부부를 흘겨보는 것은 망령(妄靈)든 짓이라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훈민가’는 아니지만 그 의취가 비슷하므로 함께 다루었는데, 형제간에 재산 분배로 송사를 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다. 종이라든지 토지라든지 하는 재산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형제라는 혈육은 어디 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다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 곳 못하면

 마소에 갓 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남으로 생긴 중에 벗같이 유신하랴.

 나의 왼 일을 다 이르려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 곧 아니면 사람됨이 쉬울까.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거든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비록 못 입어도 남의 옷을 앗지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빌지 마라.

 한적 곳 때 실은 후면 고쳐 씻기 어려우리.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위의 다섯 수는 순서대로 ‘훈민가(訓民歌)’ 여덟째, 열째, 열셋째, 열넷째, 열여섯째 수이다. 각각 향려유례(鄕閭有禮), 붕우유신(朋友有信), 무타농상(無惰農桑), 무작도적(無作盜賊), 반백자불부대(斑白者不負戴)를 제목으로 하였다. 물론 이 제목들도 송나라 진고령(陳古靈)의 ‘선거권유문(仙居勸諭文)’ 13조목에 군신(君臣),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더하여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회적 질서와 도덕을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여덟째 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권하면서 그것을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옳은 일이란 <맹자(孟子)>에서 말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곧 오륜(五倫)을 지키지 않는다면 짐승에 가깝다고 한 것을 상기시킨다. 열째 수는 벗을 사귀는 도리를 말한 것이다. 비록 남이지만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서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해 주는 벗이야말로 진정한 벗이요, 이러한 벗과의 관계를 친구간의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열셋째 수는 농사짓고 누에치는 생업에 부지런히 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내 농사만 지을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 농업 생산성을 높이자고 하여 협동 생산을 통하여 화목하고 풍요한 농촌 경제를 이룩하자고 격려하는 것이다. 열넷째 수에는 가난하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빌어먹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다. 헐벗고 주리면 범죄의 충동을 느끼기 쉬운 백성이므로 특히 이를 경계하여 한번 실수하여 죄에 물들게 되면 다시는 더러운 이름을 씻기 어렵다고 하여 참고 견디라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늙은이가 이고 지는 일이 없도록 젊은이들이 그들의 고통을 대신 감당하라는 가르침이다. 이것도 <맹자>에 나오는 가르침으로 나라가 태평하려면 반백의 늙은이가 무거운 짐을 이고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여 늙은이를 공경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서 도덕적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백성을 교화시키고자 쉽고 자연스런 우리말로 교훈시를 지었다.

  

 광화문(光化門) 들이달아 내병조(內兵曹) 상직방(上直房)에

 하룻밤 다섯 경에 스물 석 점 치는 소리

 그 덧에 진적(陳跡)이 되도다 꿈이런 듯하여라.

 

 신군망(辛君望) 교리(校理) 적의 내 마침 수찬(修撰)으로

 상하번(上下番) 갖추어 근정전(勤政殿) 밖이러니

 고은 님 옥(玉)같은 양자 눈에 암암(黯黯)하여라.

 

 봉래산(蓬萊山) 님 계신 데 오경(五更) 친 남은 소리

 성(城) 너머 구름 지나 객창(客窓)에 들리나다.

 강남(江南)에 내려곳 가면 그립거든 어쩌리.

 

 길 위에 두 돌부처 벗고 굶고 마주 서서

 바람비 눈서리를 맞도록 맞을망정

 인간에 이별을 모르니 그를 불워 하노라.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亭子)라도 쉴 이 없다.

 호화(豪華)히 섰을 제는 올 이 갈 이 다 쉬더니

 잎 지고 가지 꺾은 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어와 동량재(棟樑材)를 저리 하여 버려이다.

 헐뜯어 기운 집에 의론(議論)도 하도 할샤.

 뭇 지위 고조 자 들고 헤뜨다가 말려니.

 

<송강전집>에는 시조 작품을 지은 연대를 밝히지 않았다. 여기서는 변하거나 떠난 것에 대한 아쉬운 감회를 읊은 작품을 묶어보았다. 첫 수는 그가 29살에 병조좌랑으로 숙직했던 일을 회고한 것이다. 숙직하면서 들은,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를 생각하면서 그것도 어느덧 묵은 자취가 되어 꿈같다고 회상하고 있다. 둘째 수는 그가 32살, 34살에 수찬으로 있을 때 신응시(辛應時, 1532-1585)가 홍문관 교리로 직속상관이었는데 둘이서 번(番)을 서던 일을 회고하고 그인지 임금인지 모습이 눈에 아물거린다고 되뇌이고 있다. 셋째 수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임금이 계시는 궁궐에서 듣던 오경을 치던 종소리의 여운이 지금도 성 너머 객창에까지 들려온다고 하여 벼슬살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이같이 모두 지나간 것의 아름다움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수는 헤어지기 싫은 대상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어, 길가의 두 돌부처가 벗고 굶고 바람비 눈서리를 맞으면서도 마주 서서 헤어지지 않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리운 님을 이별하고 나서 길가에 마주선 돌부처를 보고 자신의 감회를 부친 것이다. 다섯째 수는 길가의 정자나무를 보고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생각하여 서글픈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울창하게 그늘을 지울 때는 오가는 사람들이 다 정자나무 아래에서 쉬더니 병들어 잎 지고 가지 꺾인 후에는 새마저 앉지 않는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이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세태에 대한 탄식도 숨겨져 있다. 마지막 수는 흥(興)의 방법으로 정변(政變)이나 당쟁으로 인재들이 버림 받는 현실을 한탄한 것으로, 헐뜯어 무너져 가는 집에 여러 목수들이 의논만 분분하여 먹통과 자를 들고 허둥거리다가 기둥과 들보가 될 재목을 다 버리게 되는 상황을 제시하여 국가적 위기를 상징하였다. 이 모두가 변하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고, 정치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