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의 시
조헌(趙憲, 1544-1592)은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선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자는 여식(汝式)이고 호는 중봉(重峰)이며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24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주(定州) 교수가 되었다. 성혼(成渾)을 찾아가 배웠으며 29살에 교서관 정자(正字)로 숙직하다가 대비(大妃)의 불공에 쓸 향 반출을 반대하여 삭직되고,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예조좌랑, 전적, 감찰 등을 지내고 통진(通津) 현감이 되어 범법자를 장살했다는 이유로 부평에 유배되었다. 35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탈상한 후 해주로 이이(李珥)를 찾아가 배웠다. 38살에 공조좌랑, 전라도사(全羅都事)를 거쳐, 노모를 봉양하려고 외직을 구해 보은현감이 되었다. 당쟁이 치열해지자 거처를 옥천으로 옮겼고, 43살에 공주 제독관이 되었으나 동인의 집권으로 사우(師友)가 무고 당함을 상소하고 이듬해 옥천으로 돌아가 왜군에 대한 대비와 동인의 전횡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다시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서 극언으로 상소하다가 길주에 유배되었고, 그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여 풀려났다. 48살(1591)에 일본 사신을 처단하고 국방력을 갖추라고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이듬해 임란이 나자 옥천에서 의병 천7백명을 규합하여 영규(靈圭)와 합세하고 청주를 수복했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맞아 금산에서 싸우다가 7백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했다. 키가 크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강직했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더라.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그는 젊어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에게 학문을 배워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매양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여 애를 태웠다고 하는데, 이 두 시조에서는 나라에 대한 근심은 보이지 않는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이렇게 강호한정의 세계를 표현하였을 것이다. 이이의 시조에서도 말했지만 담담하게 자연을 묘사하고 그 실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은 현실이 바로 기(氣)의 발현이고 그 현실 속에 이치 곧 이(理)가 타고 있다는 기발이승일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이 두 시조의 강호한정은 바로 눈앞의 전원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그 속에 이치 또는 이상이 구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첫 수의 초장은 연못에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 안개가 낀 한가로운 풍경의 사실적 제시다. 풍경이 바로 현상이자 관념이고, 뒤에 숨은 관념은 없다. 쉽게 말해 풍경과 관념은 하나이므로 풍경만을 즐기면 그뿐이다. 중장에는 사공도 없는 배가 매어져 있다. 이것도 사실을 직서한 것일 뿐이다. 사공과 빈 배가 따로 무엇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공도 없는 배가 매여 있다는 사실의 제시다. 종장에서도 석양에 홀로 나는 갈매기를 있는 그대로 그려놓았다. 마치 한 폭의 한가로운 전원 풍경을 담은 동양화 같다. 그림 너머에서 무언가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림만을 보고 즐기라는 것이다. 둘째 수도 마찬가지다.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설정이고,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에 빗소리라고 하여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를 나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낙조에 빗소리는 아무래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 한가로운 풍경을 조합하다 보니 저녁노을과 빗소리가 함께 등장했다. 종장은 동적이미지의 시각적 제시다.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평화로운 전원 풍경으로 보여준다. 이런 정경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요순시대의 정치가 구현된 평화로운 전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