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경세의 시

김영도 2020. 8. 19. 22:37

장경세(張經世, 1547-1615)는 선조,광해군 때의 문인이다. <선조실록>과 <장사촌유집(張沙邨遺集)>의 연보에 의하면, 자는 겸선(兼善)이고 호는 사촌(沙村)이며 본관은 흥덕(興德)으로 남원 사람이다. 10대에 부모를 여의었고 종부(從父) 급(伋)에게 학문을 배웠다. 39살에 생원이 되고 43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저작을 거쳐 임란 중에 공주 제독관, 승문원 박사, 공․예조좌랑, 전라도사를 역임했다. 52살에 난을 피해 강화에 우거하면서 시절을 슬퍼한 시를 지었고, 이듬해 왜군이 물러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56살에 금구(金溝)현령이 되었다.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겨 피폐된 고을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다음해 물러났다. 광해군 즉위 후에 벼슬에 뜻을 끊고 자연을 즐기며 ‘유선사(遊仙詞)’ 등을 지었다. 66살에 이황의 ‘도산12곡’을 본받아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12수를 지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에 힘쓴 선비였으나 시주(詩酒)를 즐기고 실무에 등한한 듯하다.  

 

 요공(瑤空)에 달 밝거늘 일장금(一張琴)을 비끼 안고

 난간을 지혀 앉아 고양춘(古陽春)을 타온 말이

 어떻다 님 향한 시름이 곡조마다 나느니.

 

 시절이 하 수상하니 마음을 둘 데 없다.

 교목(喬木)도 예 같고 세신(世臣)도 갖았으되

 의론(議論)이 여기저기 하니 그를 몰라 하노라.

 

 엊그제 꿈 가운데 광한전(廣寒殿)에 올라가니

 님이 날 보시고 가장 반겨 말하시되

 먹은 마음 다 삷노라 하니 날 새는 줄 모를로다.

 

 송옥(宋玉)이 가을을 만나 무슨 일이 슬프던고.

 한상(寒霜) 백로(白露)는 하늘의 기운이라.

 이내의 남은 저 근심은 봄가을이 없어라.

 

이 네 수는 ‘강호연군가’ 전육곡(前六曲) 중 첫째, 셋째, 넷째, 여섯째 수다. ‘강호연군가’는 퇴계의 ‘도산12곡’을 본받아 지은 것이므로 여기서도 전후 6곡씩으로 나누고, 전6곡은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정을 표현했고, 후6곡은 ‘성현 학문의 정통과 말류(末流)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것’이라 하였다. 첫째 수는 임금을 그리는 정을 읊은 것이다. 맑은 하늘에 달이 밝은데 거문고를 안고 난간에 기대 앉아 옛 양춘(陽春)곡을 타니 님 생각이 난다고 하였다. 셋째 수는 조정에 대한 근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 때는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여 서서히 분란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으므로, 시절이 하 수상하다고 하였다. 비록 대대로 자리잡은 교목세신(喬木世臣)들이 없는 바 아니었지만 당파를 지어 의견이 분분하니 나라와 조정이 걱정된다는 말이다. 넷째 수는 임금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꿈에 옥황상제가 계신 광한전에 올라가니 상제께서 반가워하여 자신의 마음속 말을 다 사뢰느라고 날 새는 줄 몰랐다고 하였다. 꿈을 통하여 임금에게 호소하고 싶은 욕구를 표출한 것이다. 마지막 여섯째 수는 송옥(宋玉)이 <초사(楚辭)> 구변(九辯)에서 “슬프구나. 가을 기운이여! 쓸쓸하구나. 초목이 시들어 떨어짐이여.(悲哉秋之爲氣也!蕭瑟兮草木搖落而變衰)”라고 읊은 것을 두고 무엇이 슬프더냐고 묻고, 찬 서리와 흰 이슬은 하늘의 기운일 뿐이므로 가을이라고 유난히 슬퍼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봄가을 계절의 변화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나라를 근심한다고 했다.    

 

 니구(尼丘)에 일월(日月)이 밝아 누항(陋巷)에 비치었다.

 욕기춘풍(浴沂春風)에 기상(氣象)이 어떻던고.

 천재(千載)에 위연탄식(喟然嘆息)하시던 소리 귀에 가득하여라.

 

 창전(窓前)에 풀이 푸르고 지상(池上)에 고기 뛴다.

 일반생의(一般生意)를 아는 이 긔 뉘런고.

 어즈버 광풍제월(光風霽月) 좌상춘풍(坐上春風)이 어제런 듯하여라.

 

 공맹(孔孟)의 적통(嫡統)이 나려 회암(晦庵)께 다다르니

 정미학문(精微學文)은 궁리정심(窮理正心) 갋일렀네.

 어떻다 강서의론(江西議論)은 그를 지리(支離)타 하던고. 

 

 장부(丈夫)의 몸이 되어 기한(飢寒)을 두릴 것가.

 일산(一山) 풍월(風月)에 즐거움이 가이 없다.

 내마다 부운부귀(浮雲富貴)를 따를 줄이 있으랴.

 

 득군행도(得君行道)는 군자(君子)의 뜻이로되

 시절(時節) 곧 어기면 고반(考槃)을 즐겨하네.

 소담한(疎淡)한 송풍산월(松風山月)이야 나뿐인가 하노라.

 

앞에서 말했듯이 ‘강호연군가’의 후6곡은 ‘성현 학문의 정통과 말류(末流)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작품은 차례대로 후6곡의 첫째, 둘째, 셋째, 다섯째, 여섯째 수다. 첫째 수는 일월과 같은 공자의 가르침을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실감한다는 내용이다. 니구(尼丘)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 추읍(鄒邑) 창평향(昌平鄕) 곧 곤주(袞州)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산 이름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공자가 일월과 같이 밝은 가르침으로 누항의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고 제자들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며 바람 쐬던 그 맑은 기상으로 혼란한 세상을 탄식하던 수천년 전의 그 말씀이 귀에 선연하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창밖에 풀이 자라고 못 위에 고기가 뛰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그들은 비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은 주돈이(周敦頤)와, 온화한 기상이 봄바람 같은 정호(程顥)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유교의 정통을 이어 자연의 섭리를 깨우친 사람은 주돈이와 정호라는 말이다. 셋째 수에서 공맹(孔孟)의 정통이 주자(朱子)라고 직서했다. 그리고 그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자세히 연구하여 궁리정심(窮理正心) 곧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수양한다는 것을 함께 말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강서학파인 육구연(陸九淵)은 궁리정심보다 덕성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주희의 학설을 지루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 그는 주희를 정통으로 보고 육구연을 말류(末流)로 생각한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다섯째 수에는 대장부가 춥고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호에서 학문과 풍월을 즐기며 사는데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를 추구할 리 있겠느냐고 자신의 굳은 각오를 말했다. 마지막 여섯째 수에서 군자의 뜻을 밝혀서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면 도(道)를 행하는 것이고, 시절을 못 만나서 임금이 알아주지 않으면 숨어서 풍류를 즐길 뿐이니, 솔숲의 바람과 산중의 달을 즐기는 엉성하지만 담담한 멋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후6곡에는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정통 학문 곧 주자학을 탐구하며 강호자연에서 풍월을 즐기는 자신의 생활을 표현하였다. 살펴본 대로 ‘강호연군가’는 ‘도산12곡’을 모방하여 전후 6곡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언지(言志)’와 ‘언학(言學)’이라는 주지를 본받아 나라와 학문에 대한 심경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