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의 시
김류(金瑬, 1571-1648)는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대동야승(大東野乘)> 등에 의하면, 그의 자는 관옥(冠玉)이고 호는 북저(北渚)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이 임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이 되고 26살(1596, 선조29)에 문과에 급제했다. 30살에 무고를 받고 사판(仕版)에서 깎였으나 대신들의 변호로 풀리고 검열, 설서 등을 지냈다. 용만의 수세관, 전주판관 등을 거쳐 39살(1609,광해1)에 직강이 되었다. 이듬해 도체찰사 이항복의 종사관, 수찬, 부교리 등을 거쳐 다음해 강계부사로 나갔다. 동지사, 성절사 등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불참하여 낙향했다. 시국을 통탄하다가 이귀와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 1등, 승평부원군이 되었고,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좌찬성, 이조판서가 되었다. 정묘호란에 강화로 왕을 호종했고, 체찰사로 군사 정비에 힘쓰고 우의정이 되었다. 다음해 좌의정이 되었고, 61살에 원종 추숭에 반대하다가 물러났다. 2년 뒤 우의정이 되었고, 66살에 도체찰사, 영의정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청군에 항복했다. 그 책임으로 삭탈관작되고,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강화를 허술히 수비한 죄로 사사되었다. 다시 서용되어 호위대장, 기로소 당상을 거쳐, 74살에 심기원(沈器遠)의 역모를 신속히 평정한 공으로 영의정, 영국공신 1등에 순천부원군이 되었다. 기골이 비범하고 문무를 겸하였으며 성품이 근엄하고 굳센 의지가 있었으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소상강(瀟湘江) 긴 대 베어 하늘 및게 비를 매어
폐일부운(蔽日浮雲)을 다 쓸어 버리고자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쓸동말동 하여라.
그가 인조반정을 모의하던 때에 지은 작품으로 생각된다. 긴 대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 간신들을 쓸어버리고 정국을 혁신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에서 소상강(瀟湘江)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에 있는 강인데 한문학에서는 흔히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하여 순임금을 따라죽은 이비(二妃)의 정절을 상기시키는 관습적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정절의 마음이 어려 있는 대나무를 베어서 하늘에 미칠 만큼 큰 빗자루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의 정신적 지향과 원대한 포부를 감추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서인이었고 당시는 대북(大北)의 이이첨과 정인홍이 권세를 잡고 있던 때다. 중장의 ‘해를 가리는 뜬 구름[蔽日浮雲]’이 바로 대북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다고 토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것을 공언할 수 없는 때다. 그래서 종장에서 시절이 매우 험난하다고 하면서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라는 구절은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갈 때 지었다는 시조에도 나오는데, 이 작품의 유사한 구절을 옮겨다 쓴 것이라 하겠다. 어쨌건 인조반정이라는 큰일을 마음속에 품고서 그 의중의 한 끝을 은근히 내어 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