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명한의 시

김영도 2020. 8. 12. 21:31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은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백주집(白洲集)> 등을 보면, 그의 자는 천장(天章)이고 호는 백주(白洲)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이정귀(李廷龜)의 아들이다. 3살에 어머니와 피난하다가 강 복판에서 배가 침몰했으나 어머니와 함께 살아났다. 16살에 진사가 되고 22(1616, 광해8)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전적, 공조좌랑 등이 되었으나 폐모론에 참여치 않아 파직되었다. 25살에 부수찬이 되고 병조정랑, 교리가 되었다.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이 되어 8도에 보내는 교서를 썼다. 교리, 이조좌랑을 거쳐 사가 독서하였고, 사간, 부응교 등을 지내고, 31살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승지를 지낸 후에 남양부사로 나갔다가, 대사간, 부제학을 역임했다. 41살에 부친상을, 다음해 모친상을 당했다. 45살에 도승지를 거쳐 강원감사가 되었다. 2년 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대사헌, 도승지 겸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냈다. 49(1643, 인조21)에 척화파라 하여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세자빈객이 되어 세자를 모시고 왔으며 이사(貳師)가 되었다. 51살에 명나라와 밀통(密通)하는 자문(咨文)을 썼다하여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예조판서가 되었다.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시원하였으며 풍류기개가 있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곳 날작시면

님의 집 창(窓) 밖의 석로(石路)라도 닳으리라.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짜르더냐 발이더냐 자이더냐.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

 

 

서산(西山)에 일모(日暮)하니 천지(天地) 가이 없네.

이화(梨花) 월백(月白)하니 님 생각이 새로워라.

두견아 너는 누를 그려 밤새도록 우나니.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草原) 장정(長程)에 해 다 져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새워 보면 알리라.

 

 

적무인(寂無人) 엄중문(掩重門)한데 만정화락(滿庭花落) 월명시(月明時)라.

독의사창(獨倚紗窓)하여 장탄식(長歎息)하는 차에

원촌(遠村)에 일계명(一鷄鳴)하니 애 끊는 듯하여라.

 

 

그의 시조 8수 중에서 사랑이나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을 골랐다.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이 다섯 수나 되는 것은 그가 풍류기개가 있었다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첫 수는 꿈에 님을 자주 만나지만 자취가 남지 않아 서운하다는 뜻이다. 창밖의 돌길이라도 닳을 정도로 자주 님을 만나는 꿈을 꾸지만 님을 그리는 자신의 간절한 그리움이 깨고 나면 흔적조차 없으니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간절한 그리움은 돌길이라도 닳게 한다는 사랑의 정염(情炎)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둘째 수는 사랑의 실체에 대한 문답이다. 그 모양이 둥그느냐 모가 졌느냐고 묻고, 길이가 한 발쯤 되는지 한 자쯤 되는지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한 우의다. 종장은 대답인데, 사랑이란 지금에 느끼는 것이므로 긴 줄은 알 수 없지만 사랑의 즐거움은 끝 간 데를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랑은 현재 시점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 즐거움은 영원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셋째 수는 님 그리는 애절한 정을 표현한 것이다. 서산에 해지고 천지는 끝없는 고적감에 휩싸인다. 배꽃 핀 봄날 달밤같이 좋은 밤이면 님은 더욱 그리워진다. 종장에서 님 그리는 애절한 정을 두견새에게 투사하여 너는 누굴 그리워해서 밤새도록 우느냐고 하였다. 외면적 고적함과 내면의 치열함이 잘 대조되어 사랑의 불길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넷째 수는 그리운 사람을 떠나 객창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형상화한 것이다. 초장에서 님이 울면서 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지 말라고 했다. 사랑을 구태여 끊지 말라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은 먼 길 떠나 해 저문 후에 객창에 홀로 등불 돋우고 님 생각에 밤을 지새게 될 때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고 했다. 이별과 그리움의 실상을 구체화시켰다고 하겠다. 다섯째 수는 님을 기다리는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 없어 쓸쓸한데 문을 닫고, 뜨락에 꽃잎 지는 달 밝은 밤에 홀로 창에 기대어 님을 기다리며 탄식할 때, 먼 동네에서 우는 닭울음소리가 애끊는 듯하다는 말인데, 한자어가 많이 쓰여 한시 취향이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고적함 속에서 님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정을 그려낸 것이다. 이렇게 그는 사대부들이 나타내기를 꺼려했던 사랑의 정서를 자유롭고 시원스럽게 표현했다.

 

 

샛별 지자 종다리 떴다 호미 메고 사립 나니

긴 수풀 찬 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는다.

아이야 시절이 좋을 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

 

 

초강(楚江) 어부(漁父)들아 고기 낚아 삶지 마라.

굴삼려(屈三閭) 충혼(忠魂)이 어복리(魚腹裡)에 들었느니

아무리 정확(鼎鑊)에 삶은들 변할 줄이 있으랴.

 

 

반(半)나마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저

백발아 네나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세 수는 주제가 각각 다르다. 첫수는 봄날의 전원풍경을 읊었다. 새벽 일찍 들로 나가는 부지런한 농부의 모습을 그려서 풍년들기를 바라는 시인의 심정을 농부의 마음에 가탁하였다. 말이 자연스럽고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어 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농촌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현실감이 살아있다. 시절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농부의 마음을 핍진하게 잡아낸 시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둘째 수는 굴원(屈原)의 충혼을 표현한 것이다. 초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이 회왕(懷王)을 섬기다가 간신의 모함을 받고 강남에 귀양 가서 멱라수(汨羅水)에 빠져죽은 고사를 들어 자신의 충성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초강 어부들에게 고기를 잡아 삶지 말라고 엉뚱한 말을 던져 시선을 모으고, 그 까닭을 풀어냈다. 굴원이 초나라 강에 빠져죽었으니 그의 충혼이 고기 뱃속에 들었을 것이고, 고기를 삶은들 충혼이야 변하겠느냐고 하여 굴원의 충성심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했다. 셋째 수는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다. 그가 51살에 죽었으니 이 작품은 만년에 지은 것이라 하겠다. 쉰 살 고비를 넘었으니 반나마 늙었다고 하고 다시 젊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다시 젊고 싶은 욕망이 말 뒷면에 감춰져 있다. 더 늙지 말고 이대로 있고 싶다는 말에서 그 본심이 드러난다. 누가 늙기를 좋아하겠는가. 백발더러 더 이상 희어지지 말아서 그나마 더디게 늙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초로(初老)에 들어서면서 늙어감을 한탄하고 늙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