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경업의 시

김영도 2020. 8. 12. 21:29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은 광해군인조 때의 무신으로 명장이다. 실록과 <연려실기술>, <임경업실기(林慶業實記)> 등을 보면, 자는 영백(英伯)이고 호는 고송(孤松)이며 본관은 평택으로 충주 출신이다. 25(1618, 광해10)에 무과에 급제하여 소농보(小農堡)권관을 지냈다. 인종반정 후 이괄의 난에 정충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振武原從)공신 1등이 되고, 우림위장(羽林衛將), 방답진(防踏鎭)첨절제사 등을 거쳐 35살에 낙안군수가 되었다. 정묘호란 후에 체찰사의 부장(副將), 용양위 부호군을 지내고, 37살에 평양 중군(中軍)이 되어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했다. 가도(椵島)의 명군을 감시하여 준동을 막았으며,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했다. 40(1633, 인조11)에 청북(淸北)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되어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하고, 명나라 반란군을 토벌하여 총병(總兵)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청북방어사 겸 의주부윤이 되었으나 오랑캐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43살에 복직되어 12월에 병자호란이 나자 백마산성에서 청군의 진로를 차단했다. 그 후 청군이 가도의 명군을 칠 때 조방장으로 명군에 이를 알려주었고, 평안병사가 되어 청군의 요청으로 명군을 칠 때에도 명군에 미리 알렸다. 청나라에서 이를 알고 체포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양구 회암사에 숨었다가 50살에 명나라에 망명하였고, 명군 총병으로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심기원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말이 있어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고, 친국을 받던 중에 김자점에 의해 장살되었다.

 

 

발산력(拔山力) 기개세(氣蓋世)는 초패왕(楚覇王)의 버금이요

추상절(秋霜節) 열일충(烈日忠)은 오자서(伍子胥)의 우히로다.

천고(千古)에 늠름(凜凜)한 장부(丈夫)는 수정후(壽亭侯)인가 하노라.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의 용맹과 기상, 충성심을 기리는 내용인데, 자신도 그와 닮고자 함을 노래한 것이라 하겠다. 초장에서 초패왕 항우(項羽)가 유방(劉邦)과 싸워서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죽을 때,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상을 지녔다고 노래한 말을 따와서 그의 힘과 기상에 버금간다고 했다. 누가 그렇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다. 중장에서 또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평왕(平王)을 피해 오나라에 망명했다가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쳐서 평왕의 시체를 매질하였고, 뒤에 오왕 부차(夫差)에게 월왕 구천(句踐)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백비(伯嚭)의 모함으로 왕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은 오자서(伍子胥)보다도 절개와 충성이 났다고 했다. 이렇게 찬양한 사람이 누구인가. 종장에서 그는 바로 한 수정후(壽亭侯) 관우이고, 천고에 늠름한 대장부라고 추켜세웠다. <삼국지연의>의 탓도 있겠지만 민간에서 관우를 무용(武勇)의 신으로 모신 만큼 임경업도 관우를 숭배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도 배청숭명(排淸崇明)의 일관된 신념을 지녔고, 청나라에 복수하고자 명나라에 망명하여 항전했으며, 뛰어난 용맹과 기상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보고자 충절을 다했던 만큼, 관우에게 자신의 지향을 투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