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후의 시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현종‧숙종 때의 문신이다. 실록에 의하면, 그의 자는 재경(載卿)이고 호는 지암(支庵)이며 본관은 해남으로 윤선도의 손자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집안에서 서로 양자를 삼으려고 하여 문제가 있었다. 39살(1674, 현종15)에 조정에서 불태운 윤선도의 소(疏)와 예설(禮說)을 베껴 올렸다가 사가에서 올린 것을 상고할 수는 없다며 기각 당했다. 41살에 성균관 유생으로 사퇴한 우의정 허목(許穆)을 소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55살(1690, 숙종16)에 정언이 되고, 2년 뒤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58살에 지평이 되었다.
초당(草堂) 청절지(淸絶池) 군현(群賢)이 모이시니
난정승연(蘭亭勝宴)이 오늘과 어떻던고.
잔 잡고 달더러 묻노니 네야 알까 하노라.
세상이 버리거늘 나도 세상을 버린 후에
강호(江湖)에 임자 되어 일 없이 누웠으니
어즈버 부귀공명(富貴功名)이 꿈이런 듯 하여라.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자료가 허술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부인 윤선도의 행적을 자랑으로 알았고, 조정을 비판했던 조부의 기개를 닮은 점이 있었던 듯하다. 늦게 벼슬에 나갔으므로 높은 직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두 편의 시조 중에서 첫 수는 여러 손님들과 초당에서 잔치하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고, 둘째 수는 전원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기분을 표현한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는 못가의 초당에 여러 선비들을 초대했다는 사실을 서술했다. 중장에는 선비들이 모인 잔치가 진(晋)나라 영화(永和) 9년(353) 봄에 왕희지가 회계산 기슭 난정에서 여러 선비들과 시주연(詩酒宴)을 연 것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했다. 자신이 교유하는 선비들의 잔치를 왕희지의 잔치에 비겨보는 자부심이 묻어있다고 하겠다. 종장은 달에게 천 3백여 년 전의 잔치와 지금의 잔치를 비교하여 어떠한지 물어보는 것이다. 달이야 변함없이 이 두 잔치를 지켜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둘째 수의 초장에는 벼슬에 나가지 못한 심정인지 벼슬에서 물러난 심정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세상과 결별한 마음을 드러내고, 중장에는 전원에서 일없이 지내는 자신의 한가함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부귀공명은 마치 꿈같이 자신의 심중에서 사라지고 현실에서 벗어나 초월적 여유를 즐긴다고 했다. 현실에 대한 관심과 그 초월적 극복을 위한 강호한정은 그의 조부인 윤선도의 작품에서 훌륭하게 구현되었으므로 그는 조부의 경지를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