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호의 시
조재호(趙載浩, 1702-1762)는 영조 때의 문신이다. <영조실록>과 <은파유고(恩坡遺稿)>에 의하면, 그의 자는 경대(景大)이고 호는 손재(損齋)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아들이고 효순왕후(孝順王后: 眞宗妃)의 오빠다. 38살(1739, 영조15)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었다. 43살(1744, 영조20)에 홍산(鴻山)현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 충청감사가 되었고, 45살에 강원감사로 옮겼다. 그 후 개성유수, 병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거쳐, 49살에 예조판서, 지돈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평안감사, 경상감사를 지냈다. 51살(1752, 영조28)에 이조판서가 되어 우빈객을 겸했다.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한 사람이 이광좌(李光佐)라고 탄핵하여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53살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도제조를 맡고, 58살에 영돈령부사로 계비(繼妃) 책립을 반대하여 임천(林川)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춘천에 은거했다. 61살에 사도세자가 화를 입게 되자 구하려고 상경했으나 실패하고, 홍봉한(洪鳳漢)의 무고로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길가에 꽃이 피니 저마다 임자로다.
삼춘(三春)에 이루던들 내 먼저 꺾을 것을
두어라 노류장화(路柳墻花)니 한(恨)할 줄이 있으랴.
사랑을 모아 내니 줌으로 하나이다.
화류도처(花柳到處)에 저마다 줄 양이면
이 후에 절대가인(絶代佳人) 만나거든 빈 손 쥘까 하노라.
그는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처남이었으므로 문과에 급제한 후 급속히 승진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둘 다 노류장화에 대한 사랑을 읊고 있어서 시인의 풍류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첫 수에서 길가에 핀 꽃은 먼저 꺾은 사람이 임자라고 하여 화류계의 관례를 말했다. 그리고 봄에 핀 꽃이라면 자기가 먼저 꺾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아마 마음에 드는 기생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던 모양이다.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기생이란 노류장화, 곧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고 대유되는 만큼 먼저 꺾는 사람이 임자이니 한스러워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둘째 수는 자신이 지닌 사랑을 모두 모으니 한 줌이 되는데, 이것을 화류계에서 만나는 기생마다 나누어 준다면 오래지 않아 사랑이 없어질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러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절대가인을 만나 오롯이 주어야 할 사랑이 고갈되고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런 사태가 올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때를 기다리면서 아무에게나 사랑을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앞의 수 보다는 태도가 사뭇 진지해졌다. 왕실의 인척으로 높은 벼슬에 급속히 올랐던 만큼 세상을 쉽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어려움을 당했던 그의 삶과 대응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