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신의 시
유세신(庾世信)은 영조 때의 가객(歌客)이다. 자는 관부(寬夫)이고 호는 묵애당(黙騃堂)이다. 시조 7수가 전한다.
밤마다 등촉하(燈燭下)에 도략(韜略)을 잠심(潛心)키는
이 몸이 장상(將相) 되어 말가죽에 싸이리라.
이따금 헌옷을 만지면서 이 잡기만 하노라.
양광(佯狂) 양취(佯醉)하니 세상사람 다 웃는다.
장읍불배(長揖不拜)할 제 취(醉)한 말을 들었는가.
정확(鼎鑊)에 더운 혼백(魂魄)이 한(恨)이 없다 하더라.
어화 저 늙은이 이문포관(夷門抱關) 긔 몇 해오.
신릉군(信陵君) 잔치할 제 상객(上客)이 되었던가.
세상에 지기(知己)를 만나면 고대 죽다 어떠하리.
님에게서 오신 편지 다시금 숙독(熟讀)하니
무정(無情)타 하려니와 남북(南北)이 멀었어라.
죽은 후 연리지(連理枝) 되어 이 인연(因緣)을 이으리라.
백화산(白華山) 들어가서 송단(松壇)에 홀로 앉아
태평가(太平歌) 한 곡조에 성세(聖世)를 읊었으니
천공(天公)이 바람을 보내어 송생금(松生琴)을 하더라.
여위고 병든 말을 뉘라서 돌아볼꼬.
때때로 길게 울어 멀리 마음 두거니와
차라리 방초장제(芳草長堤)에 오락가락하리라.
첫 수는 큰 포부를 지녔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임을 알고 자조(自嘲)한 것이다. 밤마다 등불 아래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열중하여 장군이나 재상이 되어 후한의 마원(馬援)이 말한 대로 “사내가 뜻을 세웠으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게, 늙을수록 더욱 씩씩할 것이며,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헌옷에 슬은 이나 잡으면서 소일한다는 것이다. 신분제도로 포부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막아놓은 현실에 대한 원망이 자조로 드러나 있다. 둘째와 셋째 수는 시인이 중국의 역사서를 읽고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둘째 수는 여이기(酈食其)의 고사를 읊은 것이다. 여이기가 가난하고 낙백하여 미친 체하고 지내다가 패공(沛公 : 한고조)이 진류(陳留) 고양(高陽)에 이르자 그를 찾아뵈었는데, 한고조가 걸터앉아 맞으니 길게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다. 그는 진(秦)나라를 멸하려면 진류부터 점령하라고 하여, 그 공으로 광야군(廣野君)에 봉해졌다. 뒤에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왕을 설득하여 제나라 70성을 항복받기로 했으나, 한신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습격하는 바람에 제나라에서 그를 삶아 죽였다. 그가 한고조에게 진나라를 멸할 계책을 알려주고 천하를 통일하려는 큰 뜻을 위해 애쓰다가 죽었으니 솥에 삶겨죽어도 한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포부를 펴다가 죽는다면 한이 없겠다는 내심이 숨어 있다고 하겠다. 셋째 수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신릉군이 사귀었던 북문지기 후영(侯嬴)이 신릉군의 잔치에 상객으로 참석하고, 조나라가 진나라의 침략을 받아 신릉군에게 구원요청을 했을 때, 계책을 내고 주해(朱亥)를 추천해서, 진비(晋鄙)를 죽이고 그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해 준 고사를 읊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도 후영처럼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숨은 포부를 표현했다. 넷째 수는 남북으로 떨어져 있는 님의 편지를 받고 가지가 붙은 나무처럼 만나서 함께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고, 다섯째 수는 충북 괴산의 백화산의 솔숲에서 태평가를 부르며 가야금 같은 솔바람 소리를 즐기는 한가한 모습을 읊은 것이다. 마지막 수는 여의고 병든 말에다가 자신의 늙고 병든 처지를 투영하여 자탄하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여의고 병든 말이 때때로 길게 울면서 먼 곳을 바라보며 풀이 우거진 긴 둑을 오락가락하듯이 자신도 늙고 병들었지만 전원에 묻혀서 한가롭게 살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