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묵수의 시

김영도 2018. 6. 7. 22:01

김묵수(金黙壽)는 영조 때의 가인(歌人)이다. <청구가요><한국시가사강>에 의하면, 그의 자는 시경(始慶)이고 김천택과 김수장의 후배로 경정산가단에서 활동했다. 김수장은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높고 뜻이 고매했으며 노래를 잘하고 글씨도 잘 썼다. 장단가 6장을 지었는데, 가락이 아주 호탕하고 상쾌하다.”고 하였다. 시조 8수가 전한다.




촉제(蜀帝)의 죽은 혼이 접동새 되어 있어

밤마다 슬피 울어 피 눈물로 그치느니

우리의 님 그린 눈물은 어느 때에 그칠꼬.




낙엽성(落葉聲) 찬바람에 기러기 슬피 울 제

석양강두(夕陽江頭)에 고은 님 보내오니

석가(釋迦)와 노담(老聃)이 당한들 아니 울고 어이리




님 그려 깊이 든 병을 무슨 약으로 고쳐 낼꼬.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초환단(草還丹)과 서왕모(西王母)의 천년반도(千年蟠桃) 낙가산관세음감로수(落迦山觀世音甘露水)와 삼산십주(三山十洲) 불사약을 암만 먹은들 하릴소냐.

아마도 그리던 님을 만날 양이면 긔 양약(良藥)인가 하노라.




만고이별(萬古離別)하던 중에 누구누구 더 섧던고.

항우(項羽)의 우미인(虞美人)은 검광(劍光)에 향혼(香魂)이 날아 나고 한공주(漢公主) 왕소군(王昭君)은 호지(胡地)에 원가(遠嫁)하여 비파현(琵琶絃) 홍곡가(鴻鵠歌)에 유한(遺恨)이 면면(綿綿)하고 석숭(石崇)의 금곡번화(金谷繁華)로도 녹주(綠珠)를 못 지녔느니

우리는 연리지병대화(連理枝並帶花)를 님과 나와 꺾어 쥐고 원앙침비취금(鴛鴦枕翡翠衾)에 백년동락(百年同樂)하리라.




님을 그리워하는 정이나 님과의 이별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첫 수에는 촉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나라를 빼앗기고 죽은 혼이 두견새가 되어 울다가 피를 토했다는 전설을 직서한 후에, 자신이 님을 그리워하여 흘리는 눈물은 이보다 더 슬퍼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님이 임금인지 여인인지 짐작키 어려우나 망제와 비교한 것으로 보아 임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 수는 남녀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찬바람에 낙엽지고 기러기도 슬피 운다고 하여 처창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러한 때에 해 지는 강가에서 님을 떠나보낸다면, 인생이 본디 무()라고 한 석가(釋迦)나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노자(老子)라고 하더라도 그들도 사람인 바에야 남녀이별을 슬퍼하지 않겠느냐고 설의(設疑)하였다. 그만큼 남녀이별의 슬픔은 이 시인에게 절실하고 감동적이라는 말이다. 셋째 수는 간단한 어법이다. 님이 그리워 생긴 병에는 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끌어내기 위해 그 병에 닿지 않는 여러 약을 열거했다. 도가(道家)의 선약과 선녀의 복숭아와 관음보살이 있다는 동해의 낙가산 감로수, 그리고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불사약도 사랑 병에는 닿지 않는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빙 돌려서 너스레를 떨고 그로써 시조가 산문화하는 모양을 보여준다. 마지막 수는 남녀 이별하던 중국고사를 늘어놓고 이별 없는 사랑을 하자는 다짐을 읊은 것이다. 예부터 어떤 이별이 가장 서럽더냐면서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듣고 우미인(虞美人)을 죽여 이별한 경우와, 한나라 원제 때 궁녀인 왕소군이 화친을 위해 오랑캐 선우(單于)에게 시집가게 되어 비파를 켜며 슬퍼한 경우와, 진나라 때 부호였던 석숭의 애첩 녹주를 손수(孫秀)라는 자가 왕명을 가장해 빼앗으려 하자 녹주가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 일을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두 나무가 서로 닿아 결이 통한 연리지와 한 뿌리에 두 개의 꽃이 핀 병대화를 꺾어 쥐고 오래도록 화목하게 살자고 하였다. 고사에 등장한 이별의 슬픔을 환기시켜서 이별 없는 사랑을 하자는 다짐이다.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여 호풍(胡風)을 쓸어치매

요천순일(堯天舜日)이 대명(大明)이 되었더니

오늘날 신주육침(神洲陸沈)을 불승강개(不勝慷慨)하여라.

 

촉루검(蜀鏤劒) 드는 칼 들고 백마를 호령하여

오강(吳江) 조두(潮頭)에 밤마다 달리는 뜻은

지금에 치이분기(鴟夷憤氣)를 못내 겨워함이라.




청총마(靑驄馬) 타고 보라매 받고 백우장전(白羽長箭) 천근각궁(千斤角弓) 허리에 차고

산 너머 구름 밖에 꿩 사냥하는 저 한가한 사람

우리도 성은(聖恩)을 갚은 후에 너를 좇아 놀리라.




백운(白雲) 깊은 골에 청산녹수(靑山綠水) 둘렀는데

신구(神龜)로 복축(卜築)하니 송죽간(松竹間)에 집이로다.

매일(每日)에 영균(靈菌)을 맛들이며 학록(鶴鹿)함께 놀리라.




위의 시조들은 비분강개의 정서와 호방한 기상, 그리고 강호자연에 노니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첫 수는 청나라가 일어나 명나라가 망하게 된 사실을 강개한 마음으로 읊은 것이다. 중원 천하는 한족과 이방인이 돌아가며 차지했었는데, 이러한 천운이 돌고돌아 북방 이민족을 쓸어버리고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가 섰더니만 청나라가 일어나 중국대륙을 침몰시켰다고 존명배청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했다. 둘째 수는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의 고사를 시조로 표현한 것이다.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을 평왕에게 잃고 오나라로 탈출하여 초나라를 쳐서 평왕의 시체를 매질하여 원수를 갚았다. 그 후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으나 오왕 부차는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오자서의 주장을 듣지 않고 월왕 구천을 살려주었으며, 태재(太宰) 백비(白嚭)의 모함을 듣고 촉루(屬鏤)라는 검을 오자서에게 보내어 자결하라고 했다. 오자서는 사인(舍人)에 자기가 죽은 후에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두어 오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게 하라고 말하고 죽었는데, 부차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자서의 시체를 치이(鴟夷)라는 가죽부대에 담아 강에 버렸다. 고대 영웅의 한 맺힌 일생을 시화시킨 것은 그의 장쾌하고도 처절한 풍모에 감동하였거나, 자신의 분노가 그에 필적한다는 어떤 강개함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강 가에서 말을 달리던 기상과 가죽부대에 담겨 버려졌던 분한 마음을 자신도 공감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아마 숭명배청의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셋째 수는 꿩 사냥하는 사람의 호방한 기상을 부러워한 것이다.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을 타고, 난 지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인 보라매를 팔에 받고, 긴 화살 큰 활을 허리에 찬 사냥꾼의 멋진 모습을 묘사하느라 초장이 길어졌다. 그리고 산야를 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는데, 자신도 임금의 은혜를 갚은 후에 그를 따르겠다고 하여 젊었을 때 서리로 다니지 않았나 생각되고 그 때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마지막 수는 강호자연을 즐기는 노래다. 강호가도의 전통을 이어 자연 속에 노닐며 동화된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구름과 산수가 있고 그 속 소나무 대숲 우거진 곳에 집을 짓고 버섯을 캐 먹으며 학과 사슴을 벗 삼아 산다. 그러나 이것은 시정(市井)살이에 짓눌린 서민의 소망일 뿐 사대부의 강호생활을 흉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