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원의 시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은 영조의 사위다. 실록과 <연암집(燕巖集)>에 의하면, 그의 자는 회보(晦甫)이고 호는 만보정(晩葆亭)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이다. 14살(1738, 영조14)에 영조의 셋째 딸 화평(和平)옹주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고 품계는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도총관을 지냈다. 24살에 화평옹주가 죽었다. 52살(1776, 정조0)에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두 차례 더 사은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나라의 경조사에 서사관(書寫官)으로 자주 임명되었으며, 죽은 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몸가짐이 절도가 있고 검소하였다.
동방화촉(洞房華燭) 삼경(三更)인 제 요조경성(窈窕傾城) 옥인(玉人)을 만나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시 보고 고쳐 보니 시년(時年)은 이팔(二八)이요 안색(顔色)은 도화 (桃花)로다 황금차(黃金釵) 백저삼(白苧衫)의 명모(明眸)를 흘리뜨고 반개소(半開笑)하는 양 이 오로다 내 사랑이로다.
그밖에 음영가성(吟咏歌聲)과 금리교태(衾裡巧態)야 일러 무엇하리.
그의 삼종제(三從弟)인 박지원(朴趾源)이 그의 묘지명에 쓰기를, 그는 풍모가 뛰어났고 성품이 단정했으며 대궐에 드나들어도 조정 일을 말하지 않았고, 권귀와 왕래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늙도록 변치 않았으며 왕이 땅과 노비를 내리면 모두 사양했다고 하여 평생토록 공경하고 겸손하며 조심하고 말이 적기를 실천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조에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젊어서 지은 것인지, 스물 두 살의 아내를 잃고 그를 못 잊어서 지은 시조인지는 알 수 없다. 결혼한 첫날밤에 빼어난 미인을 만나 열여섯 살 앳된 얼굴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니 황금 비녀 모시 적삼에 밝은 눈으로 웃는 모양이 이 모두 내 사랑이다. 그밖에 노래하는 목소리와 이불 속의 교태야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겉보기와는 달리 풍류스러운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고, 일찍 죽은 옹주를 못 잊어서 이런 상상적인 모습으로 아내를 회상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