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면승의 시

김영도 2018. 5. 30. 12:56

이면승(李勉昇, 1766-1835)은 정조순조 때의 문신이다. 실록에 의하면 자는 계래(季來)이고 본관은 전주다. 29(1794, 정조18)에 문과에 급제하여 33(1798)에 홍문관의 벼슬을 거쳐 지평이 되고 38(1803, 순조3)에 형정(刑政)을 비롯한 행정기강의 해이를 지적하여 왕이 이를 수용하였다. 43살에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행정의 퇴폐상을 밝혀 환곡을 시정케 했다. 그 뒤 우승지가 되어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나가 혹정을 밝히고 민심을 무마했다. 50(1815, 순조15)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53살에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55살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60살에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한성판윤, 이조형조판서, 예문관 제학, 우참찬 등을 지내고, 68살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형정(刑政)을 공정히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직되고, 이어 공조판서로 기용되어 다음해 순조가 죽자 산릉도감 제조로 있다가 병사했다. 세역제도와 지방 실정을 개선코자 노력했다. 시조 1수가 전한다

 



청류벽(淸流壁) 사월천(四月天)에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편주(扁舟)에 술을 싣고 벽파(碧波)로 내려가니

아마도 세상영욕(世上榮辱)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는 벼슬에 임하여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고 무척 애를 쓴 사람인데, 이 작품에서 그런 실상을 그대로 내비치지는 않는다. 평양 대동강의 청류벽 근처에서 뱃놀이하는 즐거움을 표현해 놓았다. 을밀대 근처의 긴 석벽인 청류벽에서 바라본 사월은 녹음과 방초가 어우러진 좋은 계절이라고 관습적 구절을 빌어 표현했다. 그런 좋은 계절에 납작한 배에다가 술을 싣고 푸른 강물에 떠가니 그 흥취가 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영욕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현실감이 없는 꿈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실 그는 현실의 부조리를 개선해 보고자 노력했지만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국세는 나날이 기우는 때였다. 비록 개선된 것이 있었다 하나 미봉책에 그쳤을 것이고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영욕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 읊어낸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