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의 시
김영(金煐)은 정조․순조․헌종 때의 무신이다. 실록에 의하면, 그의 자는 경명(景明)이고 본관은 해풍(海豊)이며 김상옥(金尙玉)의 아들이다.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1808년(순조8)에 단천 부사를 거쳐, 1811년에 삼화 부사, 1813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815년에 경상좌도 병사가 되었다. 1817년(순조17)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820년에 함남 병마절도사를 거쳐, 1828년 우포도대장을 지내고, 이듬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831년에 우포도대장, 다음해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1836년(헌종2)에 금위대장이 되고, 1838년에 총융사, 이듬해 우포도대장, 평안병사를 역임했다. 1843년(헌종9)에 호군, 한성판윤을 지내고, 이듬해 어영대장, 좌포도대장을 거쳐, 다음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죄인을 형문하다 죽이자 파직 당했다. 1847년(헌종13)에 어영대장이 되었다. 시조 7수가 전한다.
일순(一瞬) 천리(千里)한다 백송골(白松鶻)아 자랑마라.
두텁도 강남(江南) 가고 말 가는 데 소 가느니.
두어라 지어지처(止於至處)이니 네오 내오 다르랴.
빈 배에 섰는 백로(白鷺) 벽파(碧波)에 씻어 흰가.
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에 마음이 몸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
관운장(關雲長)의 청룡도(靑龍刀)와 조자룡(趙子龍)의 날랜 창이
우주(宇宙)를 흔들면서 사해(四海)에 횡행(橫行)할 제 소향무적(所向無敵)이건마는 더러운 피를 묻혔으되 어찌 한 문사(文士)의 필단(筆端)이며 변사(辯士)의 설단(舌端)으란 도창검 극(刀槍劒戟) 아니 쓰고 피 없이 죽이오니
무섭고 무서울손 필설(筆舌)인가 하노라.
현실에서 느끼는 심리적 갈등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작품을 골랐다. 첫 수는 우의적 수법으로 잘난 사람들에 대한 내면적 갈등을 끈기로 극복하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작품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리를 파악한다는 흰 송골매를 불러 재주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에게 그런 재주는 없지만 재주가 둔하여 꾸물대는 두꺼비도 목적지인 강남에 가기는 마찬가지이고, 또 잘 달리는 말이 가는 곳이면 그보다 못한 소도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남들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그 지극한 곳에 머물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하였다. 잘났다고 뽐내며 가거나 못나서 꾸물대며 가거나 간에 목표한 자리에 오르기는 같다면서 능력이나 재주에 대한 열등감을 덮어버리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둘째 수도 역시 우의적 수법을 써서 해오라기가 몸은 희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서, 사람이 겉으로 청결한 듯해도 마음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뜻을 함축했다. 빈 배 위에 서 있는 해오라기가 푸른 물에 씻기어 그렇게 희냐고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몸은 희지만 마음은 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문을 표출했다. 만일 몸처럼 마음도 희다면 진정으로 해오라기를 본받겠다고 하여, 겉으로 청백한 척하면서 속으론 그렇지 못한 무리를 은근히 풍자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무사가 휘두르는 칼보다 문사가 구사하는 붓(글)이나 혀(말)가 더 무섭다고 했다. 감정이 드러나 어조가 격해지고 말이 길어져서 엇시조가 되었는데, 대체적인 뜻은 관우와 조운의 칼과 창이 날카롭긴 하지마는 피를 묻히고야 사람을 죽이는데 반하여, 문사와 변사의 붓과 혀는 피도 흘리게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니 필설(筆舌)이 창칼보다 무섭다는 것이다. 그가 삼사(三司)의 논핵을 받고 파직을 당했을 때 이런 작품을 지었을 것이다.
눈 풀풀 접심홍(蝶尋紅)이요 술 충충 의부백(蟻浮白)을
거문고 당당 노래하니 두루미 둥둥 춤을 춘다.
아이야 시문(柴門)에 개 짖으니 벗 오시나 보아라.
소년 십오(十五) 이십시(二十時)를 매양만 여겼더니
삼사오륙십(三四五六十)이 어언간(於焉間)에 지나거다.
남은 해 칠팔구십(七八九十)일랑 병촉야유(秉燭夜遊) 하오리다.
소선(蘇仙) 칠월(七月) 이 달이요 적벽강월(赤壁江月) 이 달이라.
이 달은 그 달이나 그 사람 어디 간고.
두어라 이 달 두고 감은 날 위한가 하노라.
연(蓮) 심어 실을 뽑아 긴 노 부벼 걸었다가
사랑이 그쳐 갈 제 찬찬 감아 매오리라.
우리는 마음으로 맺었으니 그칠 줄이 있으랴.
여기에서는 무인다운 기개로 놀고 즐기는 것을 표현한 작품을 모았다. 첫 수는 술 마시고 풍악을 즐기며 벗을 기다리는 흥겨운 모습을 담은 것이다. 눈이 풀풀 날리니 마치 나비가 꽃을 찾는 것 같고 술이 충충하여 흐릿하니 술에 개미가 뜬 것 같다고 술자리의 분위기를 그렸다. 눈 오는 날 기생을 옆에 앉히고 술을 먹는 광경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니 두루미가 춤을 춘다고 하였다. 기생이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두루미처럼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런 흥겨운 때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가 나니 함께 놀아줄 벗이 오는지 기다려지는 것이다. 즐길 때 즐길 줄 아는 무인다운 흥취를 그렸다. 둘째 수에는 숫자를 이용하여 젊음에 대한 아쉬움과 늙어 즐겁게 지낼 것을 표현하였다. 어렸을 적에는 열다섯 스무 살의 젊은 날이 매양 계속될 줄 알지만, 서른 마흔 쉰 예순 살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였다. 이제 일흔 여든 아흔 살의 노년이니 남은 인생은 밤에 촛불을 밝혀놓고라도 놀아야겠다는 것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다. 셋째 수는 소동파가 적벽에서 강산풍월(江山風月)을 즐겼듯이 자신도 달밤을 즐기겠다는 내용이다. 소식(蘇軾)이 ‘적벽부(赤壁賦)’에서 말했듯이 적벽에서 강산풍월을 즐긴 것이 마침 지금이 칠월인 것과 같고 달도 변함없이 뜨는 같은 달이라고 했다. 달은 같은데 그 사람 곧 소동파는 어디 갔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소동파가 이 달을 두고 간 것은 자신더러 즐기라고 그런 것이니 마음껏 강산풍월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유락(遊樂)의 대상으로서 강산풍월이지 자연에 침잠하여 관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 수는 사랑노래다. 연(蓮)을 심어 잎줄기에서 실을 뽑아 긴 노끈을 만들어 사랑이 식어갈 때는 그 끈으로 두 사람을 동여매겠다는 것이다. 강제로 동여맨다고 사랑이 이어질지 의심스럽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으로 맺어진 사랑을 지켜내겠다고 하였다. 아마 부인에게 바치는 사랑의 맹세는 아닐 것이고 기생에게 해 보는 풍류남아의 호기어린 사랑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