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황의 시
조황(趙榥)은 순조․헌종․철종․고종 때의 학자이다. 호는 삼죽(三竹)이고, 재야의 학자로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 1수, ‘병이음(秉彝吟)’ 20수, ‘인도행(人道行)’ 10수, ‘기구요(箕裘謠)’ 40수, ‘주로원격양가(酒老園擊壤歌)’ 30수, ‘훈민가 (訓民歌)’ 10수 등 모두 111수의 시조를 지었다.
산간(山間)에 칠십옹(七十翁)이 만복경서(滿腹經書) 허사로다.
일세(一世)를 환고(環顧)하니 전할 이도 없단 말가.
천상(天上)에 백옥루(白玉樓) 있으니 이장길(李長吉)을 원하노라.
개벽래(開闢來) 인회초(寅會初)에 건부곤모(乾父坤母) 교태(交泰)할 제
오행(五行) 안에 이기(理氣)로 각정성명(各正性命) 하라시니
사람의 저마다 받은 것이 시왈병이(是曰秉彝)로구나.
내 성인(聖人) 마다하고 철가원둔(撤家遠遁)하는 당(黨)이
야소(耶蘇)로 상제(上帝) 삼고 그 아들은 제라 하며
외면(外面)에 유의관(儒衣冠)으로 저훼성거(沮毁盛擧)한단 말가.
백운산(白雲山)은 옛 빛이요 화당수(花塘水)는 무진(無盡)한데
내 성인(聖人) 계시던 집은 어이 저리 적막한고.
하물며 만정춘초(滿庭春草)에 새 소리를 어이하리.
상원갑(上元甲) 일원초(一元初)에 우리 성주(聖主) 어극(御極)하사
태아검(太阿劒) 휘각처(揮搉處)에 국내사굴(國內邪窟) 초멸(剿滅)하니
아이야 내 여생불원(餘生不遠)하다 네 전정(前程)을 바라노라.
첫 수는 젊은 날의 학문연마가 보람 없이 되었다면서 신선을 지향하는 심정을 토로한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고, 나머지 네 수는 사람의 변함없는 도리를 유교적 관점에서 읊은 ‘병이음(秉彝吟)’이다. 첫 수에서 산골에 사는 일흔 살 먹은 늙은이가 오래도록 경전을 연구하였지만 자신이 터득한 바를 전할 후학마저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통탄하고 있다. 조선말엽에 가까워지면서 민중을 이끌 이념적 지도력을 상실한 유학의 실상과 이를 연마했던 선비의 실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제의 명으로 스물일곱 살에 천상에 불려가서 백옥루기(白玉樓記)를 지었다는 이하(李賀)를 따라가서 신선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장길(長吉)은 이하의 자다. 이렇게 일생을 기울인 노력이 보람 없이 끝나게 된 것에 대한 허망감과 그로 인한 절망을 잊고자 천상을 지향한다고 했으니 죽음에의 욕구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수는 ‘병이음’의 제2수로 사람이 생겨난 이치와 병이(秉彝)의 뜻을 설파한 것이다. 천지가 개벽되고 만물이 생겨날 때 하늘인 아버지와 땅인 어머니의 결합에 의하여 인간이 태어났다. 이 때 인간은 오행 안의 이기가 작용하여 각각 바른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저마다 부여받은 본성으로 변함없는 도리를 지키는 것을 병이(秉彝)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터득한 철학적 관념을 시조의 형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의미도 명확하지 않고 시적 효과도 미흡하다고 하겠다. 셋째 수는 ‘병이음’ 제13수로 서학을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유교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서양에서 들어온 예수를 하느님으로 삼아 스스로 그 아들이라면서, 박해를 피해 집을 버리고 멀리 숨는 서학교도의 당시 실상을 적시하였다. 그리고 겉으로는 선비처럼 의관을 차리고 다니면서 유교의 큰 가르침을 해친다고 지탄하고 있다. 당시 서학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교리나 세계관의 문제를 따지기보다 유교라는 기존 관념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외면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 유학자의 시각이 드러났다고 하겠다. 넷째 수는 ‘병이음’ 제16수다. 퇴락한 공자의 사당을 보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백운산과 화당수라는 배경을 제시하고 적막한 사당의 분위기를 그렸다. 백운산은 영월, 함양, 광양, 제천 등지에 있는 산인데, 어느 산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성인을 모신 향교와 서원이 점차 쇠락함을 안타까워하면서 뜨락에 무심히 자란 봄풀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대비시켜 한탄하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수는 ‘병이음’ 제20수다. 갑자년에 고종이 즉위하여, 구야자(歐冶子)가 만든 초나라 보검으로 서학교도들을 쓸어 없애니 자신은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유교 이념이 창성하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표현했다. 고종3년에 천주교인 남종삼, 홍봉주와 프랑스 신부 베르누 등 9명의 선교사를 처형했으니, 아마 이를 두고 서학을 없애고 유교를 부흥시키고 싶은 열망을 이렇게 드러냈을 것이다.
부모의 일생정력(一生精力) 자식으로 갈(竭)하거다.
십삭후(十朔後) 성동전(成童前)에 바라느니 성인(成人)이라.
아마도 인자(人子)의 도리(道理)는 본성중(本性中)에 있느니라.
충신(忠信)에 터를 닦아 지수인산(智水仁山) 면배(面背)하고
성경(誠敬)이 주간(主幹)하여 천하광거(天下廣居) 경영(經營)하니
아마도 작지불이(作之不已)하여 들어 볼까 하노라.
남아(男兒)의 입신양명(立身揚名) 현부모(顯父母)도 크다마는
사군자(士君子) 출처간(出處間)에 때 시자(時字)가 관중(關重)하다.
아마도 주경(晝耕)코 야독(夜讀)하여 사하지청(俟河之淸)하리로다.
고금(古今)에 이단사설(異端邪說) 홍수맹수(洪水猛獸) 다름없고
명리관(名利關) 번화장(繁華場)은 심연박빙(深淵薄氷) 아닐쏘냐.
아마도 앵화수죽간(鶯花水竹間)에 독선기신(獨善其身)하리로다.
‘인도행(人道行)’ 열 수 중 네 수를 뽑았다. 제목 그대로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도리를 읊은 것인데, 물론 유교 이념을 서술한 교술시다. 첫 수는 ‘인도행’ 제2수다. 부모가 정력을 다하여 자식을 만들고 열 달이 지난 후에 낳아 길러서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이니,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행해야 할 도리는 착한 본성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것이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라는 것이다. 둘째 수는 ‘인도행’ 제4수다. 유교적 자아 수양은 나의 정성을 다하고 남을 믿는 충신(忠信)에 바탕을 두고, 앞뒤로 물같이 지혜롭고 산같이 인자하게 할 것이며, 정신 차려 깨어있음[誠敬]을 뼈대로 하여 천하의 큰 집인 인의(仁義)를 도모해 나가는 것이니 한번 시작했으면 쉬지 않고 연마하여 드디어 자기완성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수는 ‘인도행’ 제7수다. 남자가 입신양명을 해서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최종 목적이긴 하지만, 선비로서 세상에 처할 때는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니, 벼슬에 나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 때에는 시골에 숨어서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을 읽어서 자신을 연마하고, 비록 언제 올지 모르지만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행동방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수는 ‘인도행’ 제9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현의 본뜻과는 다른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범람하고 있고, 이 세상은 명리와 번화를 좇아서 분주한 곳이니 마치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자연 속에 묻혀서 홀로 자아수양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바른 도리요, 전원 속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난세를 맞아 흔들리는 유교 이념을 한사코 고수하려는 몸부림 같아 보인다.
백운동(白雲洞) 새 영당(影堂)에 부자수용(夫子晬容) 게봉(揭奉)하고
성균관(成均館) 창설시(創設時)에 예악기(禮樂器)와 노비(奴婢)로다.
아마도 전조(前朝) 진유(眞儒)는 회헌(晦軒)인가 하노라.
아동방(我東方) 성리학(性理學)에 정포은(鄭圃隱)이 종사(宗師)로다.
집집에 사당(祠堂)이요 골골마다 향교(鄕校)로다.
아마도 선죽교(善竹橋) 천고혈(千古血)은 의리중(義理中)에 원기(元氣)로다.
노사구(魯司寇) 삼일정(三日政)을 조정암(趙靜庵)이 하시니라.
대사헌(大司憲) 사흘만에 남녀이로(男女異路) 하더니라.
어찌타 그 때 소정묘(少正卯)를 살려 두었던고.
교남(嶠南)에 추노풍(鄒魯風)은 노선생(老先生)의 유운(遺韻)이라.
칠십년(七十年) 참 공부로 성학십도(聖學十圖) 바치고서
돌아가 일단화기(一團和氣)로 훈도후생(薰陶後生) 하시니라.
조정(朝廷)에 붕당론(朋黨論)이 인재 없을 장본(張本)이요
과장(科場)에 말류폐(末流弊)는 선비 없고 말리로다.
후생(後生)이 지우학(志于學)한들 누를 좇아 들으리오.
내 아이 기구업(箕裘業)을 엄사익우(嚴師益友) 없다 말고
성인(聖人)만 독신(篤信)하여 실지상(實地上)에 진진(進進)하면
천재(千載)에 일맥진원(一脈眞源)이 자연상접(自然相接)하리로다.
‘기구요(箕裘謠)’ 40수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의 업적과, 유교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구(箕裘)란 좋은 장인의 아들은 쇠를 잘 때우기 위하여 가죽옷 기우는 것을 배우고, 좋은 궁인(弓人)의 아들은 활을 잘 휘어붙이기 위하여 키 만드는 것을 익힌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자손이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우리나라 유학자와 붕당 문제, 그리고 유교 발전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다룬 작품 여섯 수를 골랐다. 첫 수는 ‘기구요’ 제34수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꼽히는 안향(安珦)의 업적을 노래한 것이다. 안향이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 가서 <주자전서>를 가져와 연구하고, 국학 대성전을 세워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였으며 유교 서적과 기물을 사들인 역사적 사실을 말했다. 후대의 주세붕이 그의 고향 순흥(영주)에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공자의 영정을 모셨으며, 고려 충선왕이 국학을 성균관으로 바꿀 때에 유교의 예악 기물을 갖추게 한 것들이 모두 안향의 업적이니, 그는 고려의 진정한 유학자라는 것이다. 둘째 수는 ‘기구요’ 제35수로 정몽주의 업적을 기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색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고 칭찬한 것처럼 정몽주가 처음이고, 또한 유교이념을 실천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으므로 사당과 향교에서 그를 모신다고 하였다. 게다가 선죽교에 뿌린 충신의 피는 유교의 삼강오륜 중에서 으뜸 되는 군신의 의리를 보여준 것이라고 찬양하였다. 셋째 수는 ‘기구요’ 제36수로 조광조를 읊은 것이다. 노나라 사구(司寇)였던 공자가 정사를 사흘 동안 주관하니 국가 기강이 바로 섰듯이 조광조가 대사헌을 맡은 지 사흘이 지나니 남녀 윤리가 바로 서게 되었는데, 어째서 공자가 제멋대로인 소정묘를 죽였듯이 조광조는 국정을 농단하는 공신 무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당해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넷째 수는 ‘기구요’ 제37수로 이황을 읊은 것이다. 영남에서 유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 것은 퇴계선생이 끼친 영향이라면서 칠십 여년 생애에 성리학을 연마하여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치고, 도산서원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다섯째 수는 ‘기구요’ 제39수로 선조조 이후 조정이 붕당에 휩싸여 인재를 활용하지 못했고, 과장에서 부정이 만연하여 유학을 쇠퇴시키는 폐단이 일어나니 애써 공부하려는 선비가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이미 유학은 시대를 이끄는 힘을 상실하고 말았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수는 ‘기구요’ 제40수다. 자식들에게 유학을 전승시키려면 엄한 스승과 좋은 벗이 없다고 탓하지 말고 성인의 가르침을 굳게 믿어 그것을 실천해 나가면 천년 전 가르침의 원류와 지금 나의 행실이 서로 합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시대를 뛰어넘어 유교적 이상을 이어보려는 간절한 희구의 표현이다.
누항전(陋巷田) 십오경(十五頃)에 팔구생애(八口生涯) 던져두고
성도상팔백주(成都桑八百株)에 동구하갈(冬裘夏葛) 자재(自在)하다.
어찌타 세간(世間) 이 재미를 이제 와서 알았는고.
도화수(桃花水) 살진 고기 네 병혈(丙穴)에 나지 마라.
은린(銀鱗)이 번득일 제 저 어부가 유연(流涎)한다.
하물며 구복(口腹)을 채우려고 그 미끼를 엿보는가.
북창청풍(北窓淸風) 긴긴 날에 주역(周易) 일권(一卷) 앞에 놓고
백우선(白羽扇) 흔들면서 태극도(太極圖)를 구경하니
아마도 쇄락(灑落)한 흉금(胸襟)이 희황상인(羲皇上人)이로구나.
홍로중(洪爐中) 타는 밭에 종일(終日)하는 저 농부야.
네 근고(勤苦) 저렇거늘 내 유식(遊食)은 어인 일고.
우리도 노력양군자(勞力養君子)하여 애민(愛民)하기 바라노라.
시인이 전원생활에서 느낀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주로원격양가(酒老園擊壤歌)’ 30수에서 우선 네 수를 골랐다. 첫 수는 ‘주로원격양가’ 제8수다. 시골에서 밭 열다섯 이랑에 여덟 식구의 생계를 걸어놓고 제갈량이 자신이 죽은 후에 자손의 생계는 성도의 뽕나무 팔백 그루가 있다고 한 말을 흉내 내어 가난한 살림살이를 말하고, 겨울에는 가죽옷 여름에는 칡베 옷 같은 변변찮은 의복에도 마음 편히 지낸다고 하였다. 가난 속에서도 욕심 없이 자유롭게 사는 생활의 만족감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수는 ‘주로원격양가’ 제13수로 벼슬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는 우화시다. 화자는 복사꽃 핀 아래 물 속에 사는 고기에게 살고 있는 구멍에서 나오지 말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고기의 은빛 비늘이 번득일 때 지나가는 어부가 침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정 모르는 고기가 미끼인 줄도 모르고 먹이를 먹었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작은 벼슬에 불려나갔다가 몸만 망치고 말리라는 경계가 숨겨져 있다. 병혈(丙穴)은 중국 섬서성 대병산(大丙山)에 있는 남쪽으로 난 구멍인데 봄이 되면 거기서 고기가 튀어나온다고 한다. 셋째 수는 제16수로 전원에서 독서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여름날 북쪽 창가에 앉아 맑은 바람을 쐬면서 <주역>을 읽으며, 부채를 흔들며 우주 변환의 이치를 그려놓은 태극도를 음미하는 즐거움은, 한편으로는 여름날의 맑은 바람이 주는 상쾌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 변환의 이치를 깨우치는 정신의 시원함이다. 그래서 이런 쇄락한 기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복희씨가 다스리던 때의 평화로운 백성이 된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제18수인 마지막 수에는 농부의 고역(苦役)을 지배층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을 읊었다. 큰 화로 속 같은 여름 땡볕에 하루 종일 일하는 농부를 제시하여 그들의 고역을 환기하고 놀고먹듯 하는 선비의 생활을 대비시켜서 심각한 자기반성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애써 농사지어 지배층을 먹여 살리는 백성의 노고를 이른바 군자라는 지배층은 깊이 깨달아서 애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간절히 기대하였다.
송하(松下)에 옷 벗어 걸고 물소리에 누웠으니
청량(淸凉)한 이 세계에 삼복증염(三伏蒸炎) 어디 간고.
세로(世路)에 의관장속인(衣冠粧束人)은 저 더운 줄 모르는가.
도처사(陶處士) 이하국(籬下菊)이 이 산중(山中)에 피었으니
소슬(蕭瑟)한 낙목천(落木天)에 중앙정색(中央正色) 풍채(風采)로다.
아마도 네 능상고절(凌霜高節) 내 벗인가 하노라.
송단(松壇)에 잠든 학(鶴)이 일진상풍(一陣霜風) 꿈을 깨어
월하(月下)에 훌쩍 나니 구만리(九萬里)에 길 열었다.
저 학아 날개를 빌려라 육합(六合) 안에 놀아보자.
산촌(山村)에 추야장(秋夜長)하니 척사성(擲梭聲)이 처량하다.
일시(一時)나 달게 자면 징조색전(徵租索錢) 어이 하리.
세간(世間)에 기환가자제(綺紈家子弟)들이 저 근고(勤苦)를 생각는가.
첫 수는 역시 ‘주로원격양가’ 제20수다. 여름날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벼슬아치의 생활에 대비시켜 보여준다. 소나무 아래에서 옷 벗어 걸고 물소리 들으며 누웠으니 시원하여 삼복더위를 모른다. 벼슬길에서 의관을 차려 입고 더위를 견디는 벼슬아치들은 더위도 모르느냐고 물어서 자신의 전원생활이 얼마나 더 나으냐고 자족해 하는 것이다. 둘째 수는 제22수다.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면서 멀거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읊었던 울타리 밑의 국화가 자신이 사는 산중에 피었다면서 낙엽 지는 소슬한 가을에 노란 빛깔을 자랑한다고 했다. 황색은 중앙을 나타내는 정색이다. 이렇게 떳떳한 군자의 색깔로 차가운 계절에 피어나니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높은 절개의 꽃이고 자신의 벗이라고 하였다. 국화를 관념화한 관습적 표현의 답습일 뿐이다. 셋째 수는 제24수로 학을 타고 천지사방을 날아보고 싶은 장쾌한 기상을 드러낸 것이다. 소나무 위에서 잠든 학이 서리 바람에 놀라서 달 아래 날아오르니 구만리를 날 것 같다. 저 학의 날개를 타고 넓은 천지를 모두 돌아다니며 놀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주로원격양가’ 제25수다. 여기에서도 백성의 고달픈 노력을 환기시키고 있다. 산촌의 가을밤은 긴데 베 짜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 베 짜는 여인은 잠도 못자고 베를 짜고 있다. 그녀가 만약 잠을 달게 잔다면 무엇으로 세금을 낼 것인가. 도대체 이런 고달픈 백성의 삶을 비단옷 입은 양반집 자제들은 짐작이나 하는지 안타까운 심정이라는 것이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고난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실상을 시골 선비의 눈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 몸을 낳고 길러 구로(劬勞)하신 내 부모가
생전(生前)과 신후사(身後事)를 바라느니 자식이라.
아마도 갈력(竭力)고 양지(養志)하여 인자도리(人子道理)하리로다.
한 혈기(血氣) 나눠 나서 형제 남매 되었으니
저 몸의 질통기한(疾痛飢寒) 내 당하나 다를쏘냐.
아마도 동생의 젛을 일을 내가 먼저 하리로다.
인생의 화복관두(禍福關頭) 삼촌설(三寸舌)에 달렸구나.
할 말도 삼가할 데 업는 말을 짓단 말가.
그 죄가 자작얼(自作蘖)이니 면할 길이 없으리라.
왕법(王法)에 난화민(難化民)은 심상처치(尋常處置) 못하리라.
민간에 섞어두면 평민에게 극해(極害)로다.
아마도 내 백성에게 멀리 멀리 하리로다.
선배들이 지은 ‘훈민가(訓民歌)’의 전통을 이어서 유교덕목을 계도하는 내용이다. 다만 서학이 들어온 때인 만큼 이교(異敎)에 대한 배타적 경계심을 드러낸 것도 있다. 첫 수는 ‘훈민가’ 제2수로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것이다.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니 살아있을 때는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정성껏 제사지내며 뜻을 받들어 나가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둘째 수는 제3수로 형제우애를 강조한다. 부모의 피와 기운을 나누어서 태어난 형제요 남매이니 병들고 주리며 춥다면 나의 고통과 마찬가지일 것이고, 만약 동생이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 일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훈민가’ 제8수다. 여기서는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생에서 재앙과 행복을 결정짓는 요긴한 대목이 말로 말미암는 경우가 많으니 할 말도 잘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재앙의 계기를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지어낸 허물이니 그 죄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말조심할 것을 각별히 당부하였다. 마지막 수는 ‘훈민가’ 제9수다. 임금이 정한 나라의 법에 교화시키기 어려운 백성은 특별하게 처치해야 한다면서 민간에 섞어두면 순화된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을 백성으로부터 멀리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학의 이념을 굳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서학에 물든 사람들이 풍교를 어지럽히는 해로운 사람들이니 격리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폐쇄적인 세계관으로는 버티기 힘든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아직 시골 선비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